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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1년(1598)

다음 해(1598) 봄 2월에 명(明)나라 장수 동일원(董一元)과 유정(劉綎)이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왔고, 진린(陳璘)은 절강(浙江)의 수군(水軍) 5백 여 척을 이끌고 와서 당진(唐津)에 정박했다가 전라도로 남하하였다.

3월에 유격(遊擊) 파새(擺賽)가 군중에서 죽었다. [6월에] 명나라에서 정응태(丁應泰)가 무고로 탄핵한 것을 믿고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파직하였고, [7월에] 만세덕(萬世德)으로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제독(提督) 유정이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가을 8월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왜병을 당진 고금도(古今島)에서 크게 격파하여 왜선 50여 척을 불태웠다.

9월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순천(順天) 왜교(倭橋)에 성을 쌓았다. 유정이 다시 진격하고, 이순신이 진린과 해구(海口)를 막고 진격하며 가까워지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사천(泗川)의 적병에게 와서 도와줄 것을 청하였다. 이순신이 [그들을 향해] 진격하여 2백여 선을 불태우고 남해(南海) 경계에까지 추격하여 이르렀다. [이순신이 적들을 맞아] 힘써 싸우다 날아오는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니 마라.”는 말을 남긴 후 죽었다. 이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이순신의 유언에 따라]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싸웠다.] 이완은 진린이 포위되자 그의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군과 싸워 포위를 풀어 주었다. 진린이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의자 위에서 땅으로 떨어져 가슴을 치면서 크게 통곡하였다.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이 [이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마다 통곡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요토미 히데요시[平秀吉, 豊臣秀吉]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권력을 잡았다.

12월에 여러 장수가 처자(妻子)들을 인질로 붙잡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오게 하니, 울산(蔚山), 사천, 순천(順天) 세 지역의 적병이 모두 바다를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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