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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년(1624)

다음 해(1624)에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이 귀성 부사(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원익(李元翼)과 이시발(李時發)이 출동하여 정벌하였다. 이전에 이괄은 왕께서 반정(反正)을 일으키실 때 대장(大將)을 바라는 마음을 품었다. [반정이 성공한 후] 공훈을 정할 때 [자신의 이름이] 이수일(李守一)의 아래에 위치하게 된 것과, 입시할 때 김류(金瑬)가 자신보다 윗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을 흘겨보더니[却立睨視], 얼마 후에 병사(兵使)로 임명되어 [외방으로] 나가게 되자 더욱더 앙심을 품게 되었다. 결국 그 아들 이전(李栴) 및 한명련과 함께 반역을 모의하였다. 전(前) 교수(敎授) 문회(文晦)가 고변(告變)하여 금부 도사(禁府都事) 고덕상(高德祥) 등이 이전을 나포해 오니, 이괄이 고덕상 등을 모두 죽이고 도성을 향해 진격해 왔다. 이에 왕께서 이서(李曙)와 이귀(李貴)에게 명하시어 각각 개성(開城)과 임진(臨津)에 군대를 주둔하여 지키게 하셨다.

봄 2월에 [이괄이 이끄는] 적병(賊兵)이 저탄(豬灘)에 도착하였다. 이중로(李重老), 박영신(朴榮臣), 윤정준(尹廷俊) 등이 사망하고 임진에서 군사들이 무너져 흩어졌다. 이귀가 한양으로 돌아와 임금께 남쪽으로 몸을 피하실 것을 권하니, 왕께서 공주(公州)로 행차하셨다. 한명련이 한양(漢陽)에 입성하여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추대하였다. 장만(張晩)이 적병들을 추적하여 대파하였고, 정충신(鄭忠信) 역시 장만의 군대에 접근하여 안현(鞍峴)에 주둔하였으며, 이서는 낙산(駱山)을 차지하고, 신경원(申景瑗)은 남산(南山)을 지키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괄이 아래에서 안현을 바라보며 싸웠는데, 마침 순풍(順風)이 불어 화살과 탄환이 비처럼 쏟아지더니 바람의 세(勢)가 갑자기 바뀌어 적군이 하풍(下風)에 있게 되었다. 이에 한명련과 이괄은 밤에 이천(利川)으로 함께 도망갔다. 도망가는 도중에 그들의 휘하에 있던 이수백(李守白)과 기익헌(奇益獻)이 한명련과 이괄을 참수한 뒤 바쳤다. [이괄 무리에게 붙었던 흥안군] 이제는 광주(廣州)로 도망갔는데, 안사함(安士諴)1)원문에는 안사계(安士誡)로 되어 있으나, 안사함(安士諴)으로 바로잡는다.가 잡아 원수부(元帥府)에 바쳤다. 심기원(沈器遠)이 [장만 등과 상의하여 이제를] 목매달아 죽였다. 왕께서 공주를 떠나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셨다.

3월에 왕께서 장만 등 32인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녹훈(錄勳)하셨다.

여름 5월에 고(故) 좌의정(左議政) 정철(鄭澈)과 장련 부사(長連府使) 황정욱(黃廷彧)의 관작(官爵)을 다시 회복시켰다. 황정욱은 임진왜란 때 왕자를 호위하여 북도(北道)에 들어갔다가, 배반한 백성들에 의해 포박되어 적진(敵陣)에 보내졌는데, 포로에서 석방된 후에 무고를 받아 길주(吉州)로 유배 보내졌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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