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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6년(1655)

다음 해(1655)에 원두표(元斗杓)로 하여금 강화(江華)를, 이심후(李深厚)로 하여금 안흥(安興)을, 이시방(李時昉)으로 하여금 남한(南漢)을, 홍명하(洪命夏)로 하여금 자연도(紫燕島)를 주관하게 하여 곡물을 저장해 둘 곳을 수리하게 하였다. 안흥진(安興鎭)에 성을 쌓았다. 능마아청(能麽兒廳, 무관을 가르치고, 시험을 보던 관청)을 설치하여 무사 20여 명으로 진법(陣法)을 시험 보게 하였다.

태학(太學)에 있던 태종(太宗) 시기의 청화잔(靑花盞)을 임진왜란 때 분실하였기 때문에 이은배(二銀杯)를 만들어 하사하셨다. 부안(扶安)의 위도(蝟島)와 영암(靈巖)의 추자도(楸子島), 나주(羅州)의 도초도(都草島), 영광(靈光)의 각리도(角里島), 작도(鵲島), 자운평(紫雲坪)을 성균관(成均館)에 귀속시켰다. 김수항(金壽恒) 등 6명의 신료에게 휴가를 주어 호당(湖堂)에서 독서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돈과 지폐를 쓰는 것은 처음에는 거친 베로 물건들을 바꾸어 써 오다가 태종이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저화(楮貨)를 만들게 하였으나 곧 폐지되었다. 선조(宣祖) 때 돈으로 쓰자는 논의가 다시 제기되었으나 역시 행하여지지는 못하였다. 인조(仁祖) 연간에는 상평청(常平廳)으로 하여금 돈을 주조하게 하였다가 곧 다시 폐지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화폐가 잘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김육(金堉)이 청(淸)나라1)원문에는 명(明)으로 되어 있으나, 청(淸)으로 바로잡는다.에 갔다가 당전(唐錢) 15만 문(文)을 무역해서 가지고 와 평양(平壤)과 안주(安州)에 나누어 두었고, 왕께서 훈련도감(訓鍊都監)에 돈을 주조하여 서울과 지방에 통용되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얼마 후 국가의 재산이 점점 줄어 없어지자 다시 혁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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