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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10년(1659)

기해 10년(己亥十年, 1659) 여름 5월 4일 갑자(甲子)에 왕께서 승하하셨다. 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시고, [선왕을] 양주(楊州) 영릉(寧陵)에 장사하였다가 후에 여주(驪州)로 이장하였다. 효종(孝宗)을 소렴(小斂, 시체에 옷을 입히는 일)할 때에 송시열(宋時烈)의 의견에 따라 시신을 완전히 묶지 않았더니 효종의 시신을 넣은 관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원상(院相, 왕이 죽은 뒤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 보던 임시 벼슬)이 세자에게 주달하여 좌우에 붙일 판자를 쓰게 하였다. 자의 대비(慈懿大妃)【인조(仁祖)의 왕후 조씨(趙氏)】의 복제(服制)를 의논할 때 송시열이 『의례주소(儀禮注疏)』에 ‘서자(庶子)는 장자를 위하여 3년을 입을 수 없다.’라고 되어 있는 조소(條疏)에 근거하여 국제(國制)에 ‘장자와 서자를 막론하고 모두 부장기(不杖朞)로 한다.’고 한 예(禮)를 말하였다. 원상 정태화(鄭太和)가 송시열의 의견에 따라 [자의 대비가 상복을 입을 기한을] 기년(朞年, 1년)으로 정하니 윤휴(尹鑴)가 의례(儀禮)에 ‘적실 부인이 낳은 둘째 아들이 대통을 이으면 그 역시 장자(長子)이다.’라고 한 문장을 인용하여 자최복(齊衰服, 굵은 생베로 짓되 아래 가를 좁게 접어 꿰맨 상복)을 3년간 입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윤선도(尹善道)가 수원부(水原府) 읍치 자리가 상격(上格)이고, 내룡[龍]으로도 최상이라고 하며 새로운 왕릉을 수원으로 모시기로 정하였는데, 이경석(李景奭), 이시백(李時白),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이 수원은 경기의 관문이고 오환(五患)1)조상 및 부모의 장지를 정할 때 고려해야 하는 다섯 가지 근심을 뜻하는 말로, 다섯 가지 근심이란 도로, 성곽, 연못이 될 자리와, 세력가에게 빼앗기거나 농지가 될 만한 곳 등을 말한다.의 염려도 있다는 것으로 의견을 제안하여, 결국 [능 자리를] 건원릉(健元陵)의 왼편 산등성이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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