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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4년(1728)

무신 4년(戊申四年, 1728) 봄 3월에 박필몽(朴弼夢)의 사촌 동생 박필현(朴弼顯), 김일경(金一鏡)의 아들 김영해(金寧海), 목호룡(睦虎龍)의 형 목시룡(睦時龍)1)원문에는 목시절(睦時節)로 되어 있으나, 목시룡(睦時龍)으로 바로잡는다. 등이 심유현(沈維賢)과 함께 기사(己巳, 1689)년에 죄로 죽은 민종도(閔宗道)와 이의징(李義徵)의 자손들과 결탁하였다. 이들은 영남(嶺南)의 반적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良)을 원수(元帥)로 삼고, 이유익(李有翼)과 이하(李河)를 모주(謀主)로 추대하였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 등은 외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금군 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은 도성 안에서 화응하여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이때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용인(龍仁)에서 살고 있었는데, 용인군에 사는 안박(安鑮)이 난을 피할 것을 권하니, 최규서가 난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도성으로 달려와서] 임금께 고변하였다. 왕께서 병조 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을 사로 도순사(四路都巡使)로, 박찬신(朴纘新)을 중군(中軍)으로, 박문수(朴文秀)와 조현명(趙顯命)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역당들의 죄를 묻도록 하셨다. 이여적(李汝迪), 박동추(朴東樞)를 계원장(繼援將)으로 삼고, 장붕익(張鵬翼)을 진어대장(鎭禦大將)으로 삼았다. 역적 권서봉(權瑞鳳), 이인좌 등이 [상가(喪家)의 장례를 치른다고 거짓으로 꾸며] 상거(喪車)에 병기(兵器)를 싣고 청주성(淸川城) 안으로 몰래 들어와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을 죽였고, [저항하는] 군관(軍官) 홍림(洪霖)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도 죽였지만, 우후(虞候) 박종원(朴宗元)은 역적에게 항복하였다. 왕께서 남연년 등이 죽었다는 것을 들으시고 거센 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굳센 풀과 같다고 그 절개를 기리신 후 남연년은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이봉상은 찬성(贊成)으로 추증하라 명하셨다. 오명항이 안성(安城)에 도착하니 역적 이인좌가 청룡산(靑龍山) 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오명항이 박찬신에게 위를 향하여 공격하라 명하여 적장(賊將) 박종원의 목을 베니 역적들이 남쪽으로 도망갔는데, 추격하여 1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군대를 옮겨] 죽산(竹山)으로 향하다가 역적들을 만났다. 오명항이 급히 군을 지위하여 산 위를 차지한 후 바람을 타고 산비탈을 달려 내려오니 적병(賊兵)이 크게 무너졌다. 관군이 역적 이인좌와 권서봉 등을 생포하여 서울로 데리고 왔다. 왕께서 ‘지확공고(志確功高)’ 네 글자를 직접 손으로 쓰신 후 오명항에게 내리셨다. 여러 역적과 그 당의 박필몽과 종실(宗室) 이탄 등을 모두 주살하고, 오명항 등 15명을 분공무신(奮功武臣)으로 녹훈(錄勳)하셨다. 왕께서 직접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네 글자를 쓰신 후 최규서의 집에 각(閣)을 지어 보관하도록 하고, 그 각의 이름을 ‘어서각(御書閣)’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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