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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3년(1799)

다음 해(1799)에 호유(湖儒) 김운주(金雲柱) 등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선정신(先正臣)1)원문에는 선정언(先正言)으로 되어 있으나, 선정신(先正臣)으로 바로잡는다. 송시열(宋時烈)의 학문이 재차 전해져 고(故) 유신(儒臣) 한원진(韓元震)에게 이르렀습니다. 한원진이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노닐면서 비밀리에 전해지던 비결을 받고, 또 스스로 터득한 것들을 참작하면서 이기(理氣)의 원류(源流)와 성리(性理)의 명의(名義)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과 인물(人物)의 성(性)을 논하였습니다. 한원진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의 성에 대해 논하기를, 사람이든 다른 존재이든 모두 똑같은 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태극(太極)이요, 사람과 사람이 같은 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존재와 존재 역시 같은 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오상(五常)이며, 사람끼리도 다른 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존재끼리도 다른 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기질(氣質)의 본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의례보편(議禮補編)』에 대해서 백세토록 이어질 법도를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김운주는 이러한 이유로 한원진의 공로를 인정하여 관위(官位)를 추증해 달라 청한 것이다. 우상(右相) 심환지(沈煥之)의 견해를 따라 그를 정경(正卿)으로 추증하였는데, 김매순(金邁淳)은 짐작하여 헤아리는 것이 너무 적다고, 김이영(金履永)은 꺼리고 피하는 것이 너무 적다는 것으로 호유의 상소에 대한 발문을 지었다. 한편 이보다 먼저 한원진, 윤봉구(尹鳳九), 이간(李柬), 이이근(李頤根), 현상벽(玄尙璧), 채지홍(蔡之洪), 한홍조(韓弘祚), 성만징(成晩徵)이 황강(黃江)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업(受業)을 받았기 때문에 강문(江門) 8학사라고 칭해졌다. 심성(心性)에 대한 의논(議論)에서 남당(南塘) 한원진과 외암(巍巖) 이간의 논의가 상호 충돌하였다. 이때 한원진의 의견을 주장하는 자는 호중(湖中, 충청도 지역)에 모두 있었으므로 그들의 주장을 호학(湖學)이라 하였고, 이간을 지지하는 자는 모두 낙하(洛下, 지금의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이들이 주장을 낙학(洛學)이라 하였다. 호학을 주장하는 무리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본래 같다고 하였고, 낙학을 주장하는 무리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본래 같지 않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낙론을 지지하는] 한천(寒泉) 이재(李縡)가 최우(崔祐)에게 남당 한원진이 강설한 내용을 듣고 시를 지어 ‘듣자 하니 한원진은 심(心)과 성 사이에서, 기(氣)의 영역을 지나치게 크게 잡았다.’라고 하였다. 왕께서 연신(筵臣)에게 김매순과 김이영의 무리는 홀로 “조화중물(造化中物)”이 아닌가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수많은 냇물을 비추는 밝은 달[萬川明月]’이라 호에도 이 달이 비추고, 낙에도 이 달이 비친다.”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일개(一箇) 월인(月印)의 파심(波心)이 샘과 못에 생기니, 사물의 맑고 탁함[涇渭]이 바로 이로부터 생긴다.”라고 하시며 규장각(奎章閣)이 어제(御製) 4집을 올리니 모두 30목(目) 191편(編)이었다. 그 책에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제목을 붙이셨다. 왕께서 직제학(直提學) 이만수(李晩秀)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자호(自號)하려 하니 물은 세인(世人)이요 달은 태극이니, 태극이 바로 나이다.”라고 하셨다. 대제학(大提學) 홍양호(洪良浩)가 북관(北關) 흥왕고적(興王古蹟) 4편을 집진(輯進)하니 『흥왕조승(興王肇乘)』이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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