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국조사
  • 광해군(光海君)-순종(純宗)
  • 태황제조(太皇帝朝)
  • 태황제 19년(1882)

태황제 19년(1882)

임오 19년(壬午十九年, 1882)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 2영을 설치하여 이경하(李景夏), 신정희(申正熙)를 대장(大將)을 삼았다. 일본인(日本人)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를 초빙하여 병제(兵制)를 훈련하고 별기군(別技軍)이라 불렀다. 벼슬아치들의 자제 1백여 명을 선발하여 하도감(下都監)에서 기예를 학습하게 하고, 그들을 사관 생도(士官生徒)라 불렀다. 교린국서보(交隣國書寶)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여름 6월에 훈국(訓局) 군졸의 폐면(廢免)한 자가 여러 달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월급[月料]을 지급하는 날 창고 관리가 농간을 부려 모래를 섞은 오래된 쌀을 지급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이 크게 원망하고 분노하여 권세 있는 척신들의 집과 서울 부근의 산에 있는 여러 사찰을 훼손하고 파괴하였으며, 호리모토 레이조를 살해하고 일본 공관(公館)으로 가서 포위하였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제물포(濟物浦)로 도망갔다. 해가 밝을 무렵에 난리를 일으킨 군졸들이 돈화문(敦化門)으로 돌격해 들어가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민겸호(閔謙鎬), 김보현(金輔鉉) 등을 살해하였다. 이에 홍재희(洪在羲)가 왕비를 배호(陪護)하여 도망가 피하여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1)원문에는 장원(章院)으로 되어 있으나, 장호원(長湖院)으로 바로잡는다. 민응식(閔應植)의 고향 집으로 갔고, 대원군(大院君)이 급히 궁으로 와서 소란을 진압하셨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은 중상을 입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위영과 장어영 두 영을 비롯하여 기무아문을 혁파하였고, 훈련(訓鍊), 금위(禁衛), 어영(御營) 등 옛 영들을 다시 설치하였다.

가을 7월에 청(淸)나라 수군 제독[水師提督] 오장경(吳長慶)이 내위(來衛)하여 대원군을 천진(天津)으로 데리고 갔다.

8월에 중궁이 궁으로 돌아오시고 난리를 일으킨 군졸 10명을 잡아 와 처형하였으며, 훈련도감(訓鍊都監)을 혁파하였다.

겨울 11월에 통리교섭통상아문(統理交涉通商衙門)을 설치하여 독일[德國] 사람 묄렌도르프[穆麟德, Paul Georg von Möllendorff]로 협판(協辦)을 삼았다. 군국기무아문(軍國機務衙門)을 설치하여 청(淸)나라 사람 왕석창(王錫鬯)은 참의(參議)로, 마건상(馬建常)은 찬의(贊議)로 명하셨다. 일본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인천항(仁川港)으로 오자 전권 대신(全權大臣) 이유원(李裕元), 김홍집(金弘集)을 파견하여 수호 속약(修好續約)을 의논하여 체결하도록 하였다. 주일 전권 대신(駐日全權大臣) 박영효(朴泳孝)로 하여금 수신사(修信使)를 겸하여 김만식(金晩植), 민영익(閔泳翊), 김옥균(金玉均)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보냈다.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하여 어윤중(魚允中)으로 구관(句管)하게 하고, 원산항(元山港)을 개항하여 미국(美國)과 교호 통상(交好通商)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