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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황제 21년(1884)

갑신 21년(甲申二十一年, 1884)에 기연(畿沿) 해방영(海防營)을 부평부(富平府)에 설치하여 민영목(閔泳穆)을 총관(總管)으로 삼았다. 우정총국(郵政總局)과 오금개광국(五金開鑛局), 농상국(農商局), 직조국(織造局), 목축국(牧畜局), 자전국(瓷甎局), 지국(紙局), 다국(茶局) 등 여러 국의 설치를 명하셨다. 관복(官服)은 흑단령(黑團領)만 입고, 사복(私服)은 착수의(窄袖衣)를, 전복(戰服)은 사대(絲帶)를 다만 착용케 하셨다.

겨울 10월 17일 밤에 개화당(開化黨)의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이 여러 나라 공사(公使)를 우정국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민영익(閔泳翊)이 담장 밖에서 불이 난 것을 보고 나가서 구하려고 하다가 문 밖에 있던 다섯 적의 공격을 받고 부상을 당해 돌아왔다. 김옥균 등이 궁궐로 바로 침입하여 청(淸)나라 군사가 난을 일으켰다고 무고(誣告)하고, 일본 공사(日本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불러들였고, 사관 생도(士官生徒)를 몰래 부추겨 좌영사(左營使) 이조연(李祖淵),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 전(前) 영사(營使) 한규직(韓圭稷), 해방 총관(海防總管) 민영목, 보국 찬성(輔國贊成) 민태호(閔台鎬), 조영하(趙寧夏), 중관(中官) 유재현(柳載賢) 등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에 여러 관료와 백성들이 청나라 통령(統領) 오조유(吳兆有), 사마(司馬) 위안스카이[袁世凱], 총병장(總兵張) 등에게 궁궐 문으로 나누어 들어올 것을 청하고, 우리나라 좌우(左右) 영병(營兵)이 또한 따라 들어와 일본군과 격투하였는데, 이때 죽거나 다친 사람이 양쪽에서 모두 생겼다. 무예위사(武藝衛士)와 별초군(別抄軍)이 왕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옥류천(玉流泉) 뒤 북장문(北墻門)으로 나갔다. 김옥균 등은 일본 병사를 따라 도망가고 홍영식과 박영효, 그 밖의 생도 7인은 왕이 탄 수레를 따라 북관왕묘(北關王廟)에 이르니 오조유 등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맞이하였다. 우리나라 군사가 홍영식, 박영효, 생도 7인을 베어서 죽이니 왕께서 하도감(下都監) 위안스카이의 영방(營房)으로 이어(移御)하시고, 각 전궁(殿宮)은 노원(蘆原)에 이차(離次)하셨다.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군사들을 이끌고 성을 나가니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단발하고 서양 옷을 입고 따라 나서 일본으로 도망갔다. 23일에 왕이 궁으로 돌아오시고 다음 날 각 전궁들도 궁으로 돌아오셨다.

벼슬아치들과 선비 및 일반 서민이 입는 평상복을 편의에 따르게 하셨다. 외무 독판(外務督辦) 조병호(趙秉鎬)를 감리 인천항 통상 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로, 홍순학(洪淳學)을 부관(副官)으로 임명하여 인천으로 가서 사의(事宜)를 상판(商辦)하게 하였다. 통리군국아문(統理軍國衙門)을 혁파하여 의정부에 통합하였다.

겨울 11월에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다. 김홍집(金弘集)을 전권 대신(全權大臣)으로 삼아 5개 조항의 약관(約款)을 의결하여 체결하게 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서상우(徐相雨)를 전권 대신으로, 외무 협판(外務協辦) 묄렌도르프[穆麟德]를 부사(副使)로 특별히 임명하여 일본으로 가서 일들을 판별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해방 총관(海防總管) 이규원(李奎遠)을 동남 개척사(東南開拓使)로 임명하고 영국(英國) 및 독일[德國]과 교호 통상(交好通商)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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