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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222년

기원전 222년

경인(庚寅)

왕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여 가까이 총애하는 문신들과 술 마시고 시를 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는데, 호종하는 장사(將士)들은 매우 굶주렸다. 견룡 산원(牽龍散員)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 등이 상장군(上將軍) 정중부(鄭仲夫)에게 말하기를, “문신은 취하고 배부른데 무신은 굶주리고 곤궁하니 참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중부는 일찍이 김돈중(金敦中)이 수염을 태운 원한을 갖고 있었다. 이에 함께 비밀리에 흉모를 꾸미고 말하기를, “왕이 만약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 가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왕은 무신들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수박희(手搏戱)를 추게 하고 대우를 잘해 위로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뢰(韓賴) 등이 무신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하여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이 수박희에서 이기지 못하자 뺨을 때리며 모욕을 주었다. 왕과 이복기(李福基)와 임종식(林宗植) 등이 따라서 즐거워하며 웃었다. 정중부가 사납게 소리지르며 말하기를, “이소응이 비록 무부(武夫)이지만 관계(官階)가 3품인데 어찌 그리 심하게 욕합니까?”라고 하자, 왕이 위로하며 풀어주었다.

어가가 보현원에 가까워지자 이고와 이의방이 왕의 교지라 속이고 순검군(巡檢軍)을 모이게 하고, 왕이 겨우 문으로 들어가자 이고 등이 문에서 임종식과 이복기를 직접 살해하였다. 한뢰는 달아나 왕의 침상 밑에 숨어 임금의 옷을 끌어당겼으나 이고가 칼을 빼어 베었다. 이에 호종하는 문관과 여러 환관을 대학살하니 시체가 산과 같이 쌓였다. 이고와 이의방, 이소응 등이 날쌔고 용감한 사람을 골라 곧바로 대궐에 들여보내 추밀사(樞密使) 양순정(梁純精) 등 10여 인을 죽였다. 또 태자궁(太子宮)에 가서 소속 관리 10여 인을 죽이고 길에서 소리치기를,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 하더라도 남김없이 죽여라.”라고 하자, 따르는 무리들이 이때를 틈타 봉기하여 평장사(平章事) 최포칭(崔褒稱), 허홍촌(許洪村)과 지추밀(知樞密) 서순(徐醇), 최온(崔溫), 상서승(尙書丞) 김돈시(金敦時), 그리고 대사성(大司成) 이지심(李知深) 등 50여 인을 찾아 죽였다.

드디어 군사를 동원하여 왕을 협박하고 궁궐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환관 왕광취(王光就)가 모의하여 정중부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또다시 내시와 환관 수십 명을 대학살하였다. 당시 왕의 총애를 받은 사람을 처참하게 베어 죽여 거의 없었는데 왕은 음악을 연주하며 술을 마시고 태연하였다. 정중부가 왕을 군기감(軍器監)으로 옮기고, 태자를 연은관(延恩館)으로 옮겼다. 난이 일어나 문신 가운데 비록 죽음을 면하였어도 다수가 구금되어 욕을 당하였는데, 오직 전 평장사 최유청(崔惟淸)과 서공아(徐恭雅)는 무신들의 존경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김돈중은 도망가 감악산(紺嶽山)에 숨어 있다가 정중부가 포상금을 걸어 잡아 죽였다.

○ 정중부가 왕을 핍박하여 거제(巨濟)로 보내고, 태자는 진도(珍島)로 추방하고 왕의 동생 익양공(翼陽公) 호(皓)를 옹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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