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조선역대사략 권1
  • 기자기(箕子紀)
  • 기자(箕子)
  • 기원전 2513년 기묘 [기자 원년]

기원전 2513년 기묘 [기자 원년]

【주 무왕 원년】

【 ○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경세보편(經世補編)』을 살펴보면, “무자년에 기자가 중국인들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라고 하였다. 무자년은 곧 주 성왕(周成王) 3년이다. 기자가 조선으로 피난하여 온 것은 필시 무왕이 상나라를 이긴 초기인데, 어찌 은나라가 망하고 나서 10년을 기다린 뒤에야 그리하였겠는가? 또한 『옥당강감(玉堂綱鑑)』에는, “기자가 임오년 여름에 주나라에 조빙하였다.”라고 하였다. 임오년은 무자년의 이전이니, 무자년에 조선에 들어왔다는 설과 크게 어긋난다. 『경세보편』에 기록된 것은 자못 의심스럽다.】

백성들에게 예악을 가르치고 8개의 조약을 시행하였으며 신의(信義)를 숭상하고 경술(經術)을 독실하게 하니, 해가 지나면서 백성들이 스스로 교화하여 중국의 풍속을 이루었다. 【『한서(漢書)』를 살펴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 갚고,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으며, 도둑질한 자는 몰수하여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8개의 조약 가운데 세 가지로 나머지는 상고할 수 없다. 또 이수광(李睟光)이 저술한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어떤 사람이 오륜(五倫)을 합치면 8조가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 정전(井田)을 구획하고 덕정(德政)을 베풀며 농사와 뽕나무 가꾸기를 권장하였다.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들어 온 세상이 기뻐하며 백성들의 삶이 안락하여 각자 그 생업을 편안하게 하였다. 대동강을 황하와 견주고 영명령(永明嶺)을 숭산(嵩山)과 견주어 노래를 지어 그 덕을 칭송하였다. 【정전은 평양부 남쪽 밖에 있고, 성 안의 유적이 지금까지 뚜렷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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