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조선역대사략 권1
  • 기자기(箕子紀)
  • 기자(箕子)
  • 기원전 2474년 무오

기원전 2474년 무오

기자가 훙(薨)하였다. 【살펴보건대 『진조통기(震朝通紀)』에는, “기자가 병술년에 태어나 무오년에 죽었으니 주 무왕과 동시로서 수명 또한 같으니 이상하다.”라고 하였다.】

묘가 평양부에 있다. 【『사기평림』을 살펴보면 미자 세가 주(註)의 색은(索隱)에는, “두예(杜預)가 ‘양국몽현(梁國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살펴보면, “몽현에 기자의 무덤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산동포정요동사(山東布政遼東司) 고적(古蹟)」조에는 “평양성 밖에 기자의 묘가 있다.”라고 하니, 두예의 주장이 어디에 근거하였는지 모르겠다. 어찌 잘못 전해 듣고 그랬으랴? ○ 또 『후한서(後漢書)』를 살펴보면, “기자가 조선으로 피신하여 8조의 금약(禁約)을 시행하여 완고하고 각박한 풍속을 옛 풍습으로 되돌려 놓으니 나라가 유순하고 삼가하게 되어 서남북쪽 세 지방의 풍속과는 다르다.”라고 하였다. 유종원(柳宗元)의 「기자비(箕子碑)」에서 이른바 “비속한 풍속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이(夷)를 화(華)로 만들었다.”고 한 것은 실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기자는 우리나라에서 실로 인재를 양성한 큰 은덕을 베풀었으니, 기자의 인현(仁賢)의 가르침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는 머리를 풀고 왼쪽으로 옷을 여미는[被髮左袵] 오랑캐였을 것이다.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 살고 싶어 하였으니 이미 우리나라에 기자가 남긴 교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우리나라의 여러 역사서를 살펴보면, “기부(箕否)는 기자의 41대 손이다.”라고 하였다. 기자로부터 기부에 이르기까지 40대인데 세대를 이어온 역대 임금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애석하다. 우리나라의 문헌으로는 징험할 수 없다. 또한 여러 역사서에 기자의 후손 조선후(朝鮮侯)가 주 양왕(周襄王)이 군사를 일으켜 연(燕)나라를 정벌하려는 것을 보고 주 왕실을 받들고자 하니 대부 예(禮)가 간하여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이는 필시 전국시대에 있었던 일이나, 그 역시 세계(世系)와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내어 기록할 수 없으니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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