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조선역대사략 권1
  • 삼한(三韓) ○ 마한 진한 변한
  • 마한(馬韓)

마한(馬韓)

한 혜제(漢惠帝) 정미년에 기준이 위만에게 쫓겨 좌우 관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금마군(金馬郡)에 이르러 건국하고 한왕(韓王)이라 칭하면서 50여 나라를 통솔하니, 큰 나라는 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기준으로부터 여러 대를 거쳐 한 성제(漢成帝) 계묘년에 이르러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내려와 거처할만한 땅을 구하자 마침내 동북쪽 100리를 떼어주고 경계로 삼았다.

신망(新莽) 기사년에 이르러 온조에게 멸망당하였다. 【금마군은 지금 익산(益山)이다.】

정미년에 흥기하여 기사년에 망하기까지 모두 203년이다. 기자로부터 온조에게 전위되기까지 모두 1131년이다. 【생각해보건대 기준이 위만에게 땅을 빌려주면서 이미 나라를 잃었고, 그의 후손 또한 온조에게 땅을 빌려주고서 결국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호랑이를 길러 환란을 당하였으니, 후대가 전대의 일을 징험으로 삼지 않아서 마침내 인현(仁賢)의 제사마저 소홀하게 되었으니, 애석하도다. 또한 이정구(李廷龜)의 「기자 숭인전비(箕子崇仁殿碑)」살펴보면, 대략 말하기를, “말기에 잔약한 후손 세 사람이 있었는데, 친(親)은 그 후에 한씨(韓氏)가 되었고, 평(平)은 기씨(奇氏)로 되었으며, 양(諒)은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 선우씨(鮮于氏)의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운서(韻書)』에는, “선우는 아들의 성이다. 주(周)가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지자(支子) 중(仲)에게 우(于) 땅을 식읍으로 주었기 때문에 선우(鮮于)씨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강목』에는,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그 아들에게 우 땅을 식읍으로 주었기 때문에 선우를 성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에게 준 시에는, “기자의 후손은 수염이 무성한 사람이 많다. 선우가 기자의 후예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라 하였다. 홍무(洪武) 연간에 선우경(鮮于景)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중령 별장(中領別將)이 되었다. 그 7대 후손 선우식(鮮于寔)이 태천(泰川)에서 숭인전 옆으로 와서 살게 되자 마침내 선우식을 기자의 후손으로 삼고 전호(殿號)를 숭인전이라 하였으며 선우식은 전감(殿監)이 되어 자손 대대로 이어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기자의 후사와도 관련되고 또 우리나라에서 기자를 존숭하여 받드는 뜻과도 관계되므로 모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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