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조선역대사략 권3
  • 본조기(本朝紀)
  • 선조 대왕(宣祖大王)
  • 기원후 207년 무술 [선조 31년]

기원후 207년 무술 [선조 31년]

전 참찬(參贊) 성혼(成渾)이 졸하였다. 성혼은 자는 호원(浩原)이고, 호는 우계(牛溪)이며,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다.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아갔다. 일찍이 특명으로 입시하여 강론하다가 얼마 후에 파산(坡山)으로 귀향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64였다. 【인조 때에 좌의정으로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숙종 때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 명나라 황제가 명하여 양호(楊鎬)를 파직하여 귀환시키고, 만세덕(萬世德)을 보내 양호와 대체하였다. 그 때 명나라 찬획 주사(贊劃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상소하여 양호의 죄를 논하였으므로, 황제가 명하여 양호를 파직하고 귀환하게 한 것이다. 왕이 최천건(崔天健)을 파견하여 양호가 모함을 받았다고 변론하였다.

○ 이항복(李恒福)과 이정구(李廷龜) 등을 보내 무함받은 일에 변론하였다. 정응태가 우리나라를 무함하는 것이 매우 처참하였다. 왕이 이항복 등을 보내 그 무함을 변론하였는데, 주문(奏文)은 이정구가 제술한 것이다. 명나라 황제가 5부(五府)·9경(九卿)·과도(科道) 등의 관리들에게 회의하라고 명하였는데, 뭇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우리나라의 충정(忠貞)을 밝혀내고 정응태의 그릇되고 망령됨을 지적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명하여 무함당한 사실을 분명히 밝혀 치욕을 씻도록 하고, 정응태를 삭탈 관직하여 서민으로 만들었다.

○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왜병을 격파하고 유탄에 맞아 졸하였다. 이순신이 주사(舟師)를 이끌고 왜군을 공격하여 여러 번 크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적의 선박이 감히 서쪽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노량(露梁)에서 적을 만나 크게 싸워 대파하였는데, 유탄에 맞아 마침내 졸하였다. 【노량은 남해현(南海縣)에 있다.】

○ 왜적이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이 때 수길(秀吉)이 죽었으므로 왜적이 그 소식을 듣고 마침내 철수하여 돌아간 것이다.

○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였다. 임진년 왜군을 정벌할 때, 관왕(關王)이 여러 번 그 혼령을 드러내어 신병(神兵)으로 싸움을 도왔다. 명나라 군인들이 각기 돈을 내어 숭례문(崇禮門) 밖 산기슭에 사당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경비를 보태 조성하였다. 공사를 마치자, 임금이 친히 가서 만들어 놓은 소상에 절하였다. 경자년에 이르러 명나라 조정에서 4천 금(金)을 무신(撫臣) 만세덕에게 주며 우리나라에 사당을 건립하라고 하였다. 그 조서에 이르기를, “관공(關公)의 영혼은 본디 중국에 드러나있는데, 왜를 평정하는 전쟁에서도 또한 의뢰하여 나타나 도왔으므로, 본국에서 진실로 마땅히 제사지내야 한다.”라고 하였다.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또 흥인문(興仁門) 밖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명나라에서 사당의 이름을 현령 소덕왕 관공지묘(顯靈昭德王關公之廟)라고 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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