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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檀君) 전설

조선반도에서 나라를 이룬 사람 중 가장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사람은 앞에 기록되어 있는 기자이지만, 그보다 더 이전에 단군(檀君)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따금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 한마디 해야 한다.

본래 단군에 관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서적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인각사(麟角寺, 경상북도 군위군) 주지 일연선사(一然禪師)가 편찬했으며,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 고려 충렬왕 무렵】이다. 수천 년 전의 중국 고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기자 전설과 삼국유사에 단군에 관한 전설을 비교하면, 단군에 따른 전설은 대단히 새로운 전설이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같은 책 속에 『단군고기(檀君古記)』라는 책을 인용했지만, 이 책은 『삼국유사』와 서로 멀지 않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설은 일찍이 중국의 서적들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조선에서만 전해지고 있는 전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 인종(仁宗) 원년, 지금으로부터 790여 년 전】 고려에 온 송나라의 사절인 노윤적(路允迪)의 수행원이었던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당시 고려의 나라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특히 「건국(建國)」이라는 장(章)을 두었음에도 전혀 단군이라는 말을 기록한 것이 없다. 대략 25년 후에 완성된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金富軾) 지음, 고려 인종 23년, 지금으로부터 770여 년 전】에도 이러한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군이 개국(開國)했다는 전설은 고려 중기까지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알려지게 된 것은 『삼국유사』 시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삼국유사』에 기재되어 있는 이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 가리킨다.】 이 있었다.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구(貪求)했다.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삼위대백(三危大伯)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가서 살면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정상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 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한다. 환웅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한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로 하여금 장차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병(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고, 선악(善惡)을 주관하게 했다. 무릇 인간의 360여 일들을 주관하고, 세상에 살면서 교화했다. 때마침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항상 신웅(神雄)에게 기도하면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20개를 남겨 놓으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라고 했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먹으면서 삼칠일(三七日) 동안 몸을 삼갔다. 곰은 여자의 모습을 얻었고, 호랑이는 금기를 하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을 할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매일 단수(壇樹) 밑에서 아이를 잉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환웅은 이에 잠시 사람이 되어 그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을 단군(檀君)이라고 불렀다. 왕검(王儉), 당고(唐高) 【고(高) 자는 요(堯)의 휘자(諱字이다.】 가 즉위한 지 50년 만인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또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다. 이곳은 또한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나라를 1500년 동안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 【호(虎) 자는 무(武)의 휘자이다.】 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山神)이 되었다.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위의 전설 내용이 불가사의하여, 불교 설화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얼핏 보아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전설은 조선의 북부와 관계가 있고, 조선의 남부에 관계가 없으므로, 신라 시대에 단군이라는 존재는 전혀 존숭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 이 전설은 이조(李朝) 초기에 이르러 점차 존숭되기에 이르렀으며, 세종(世宗) 【제4대】 11년 【지금으로부터 490년 전】 에 처음으로 단군 사당을 평양에 건립하여, 기자(箕子) 사당과 단군 사당에서 봄·가을로 두 차례씩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렇지만 세종 때 윤회(尹淮)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조목에 ‘영이(靈異)’라고 하여 단군 전설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 후 단군에 관한 유적(遺跡)도 증가되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성종 12년에 완성되었다.】 이 편찬될 때에는 그 안에 수록된 것이 적지 않았다. 또 『동국여지승람』과 거의 동시에 명을 받고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 【서거정(徐居正) 등 지음, 성종 15년에 완성되었다】 에는 그 권수(卷首)의 외기(外紀)에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기사가 함께 수록되어 있지만, 단군조선에 관해서는 자못 의문스러운 관점에서, “당분간은 그대로 두고, 후에 고찰하여 보완한다[姑存之 以備後考]”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정사(正史)에 기록됨으로써, 단군은 기자보다 앞서는 조선 개국의 시조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상은 단군 전설이 발전해 온 것을 개략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이조시대의 유명한 학자 중에는 이 전설이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라고, 아울러 이 전설이 승려의 손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근래에 본국에 있는 학자들의 연구도 역시 모두 동일한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이 전설을 본문 내용에 채택하지 않았으며, 참고로 이 비고 부분에 부기(附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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