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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시호(諡號)

고구려국 여러 왕들의 추호(追號)는 왕이 태어났을 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적도 있다. 【예를 들면 주몽(朱蒙)은 ‘동명(東明)’인데, ‘성(聖)’자를 붙여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했고, ‘유리(類利)’는 ‘유리(琉璃)’인데, ‘명(明)’자를 붙여 ‘유리명왕(琉璃明王)’이라고 했으며, 혹은 ‘보장(寶藏)’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보장왕(寶藏王)’이라고 한 경우이다.】 혹은 문장의 뜻에 따라 그 왕의 특색을 나타내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광개토경평안호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 ‘장수왕(長壽王)’ 등과 같은 경우이다.】 그런데 대다수는 능묘(陵墓)의 지명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동천왕(東川王)’, ‘봉상왕(烽上王)’, ‘고국원왕(故國原王)’, ‘소수림왕(小獸林王)’ 등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중국식의 시호를 붙인 경우는 전혀 없었다. 단지 장수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후위(後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시호를 ‘강(康)’이라고 내린 경우가 있을 뿐이다.

백제국 여러 왕들의 추호는 대체로 모두 태어났을 때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무령왕(武寧王) 【제25대】 이래로 마지막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7대(代)만은 시호를 사용했다.

신라도 통일 전에는 대체로 모두 이름을 왕들의 추호로 썼지만, 통일되기 조금 전인 법흥왕(法興王) 원년에 선왕(先王)에게 시호를 추증하여 ‘지증(智證)’이라고 했다. 이것이 신라 시호의 시작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는 불법(佛法)이 왕성하게 일어나던 시대였으므로, 지증(智證), 법흥(法興), 진흥(眞興), 진지(眞智), 진평(眞平), 선덕(善德), 진덕(眞德) 등은 모두 시호라기보다는, 차라리 부처를 숭상하는 왕의 덕을 찬양한 존호(尊號)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중국식 시호를 채용한 것은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제29대】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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