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1
  • 9. 고려 2
  • 비고(備考)
  • 윤관(尹瓘)

윤관(尹瓘)

윤관(尹瓘)은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여진을 정복했다는 것은 역사에서 유명하므로 여기에서 한마디 해야 한다.

윤관은 자(字)가 동현(同玄)이고 파평현(坡平縣) 【경기도 문산역(汶山驛)】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승진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 이때 여진(女眞)은 동북경(東北境) 【함경도】 에 자리 잡고 살아 변경의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숙종(肅宗) 【제15대】 때 임간(林幹)을 장수로 삼아 여진을 토벌하려 했지만 오히려 크게 패배했다. 그리하여 왕은 윤관으로 하여금 대신 공격하게 했지만 다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윤관은 돌아와서 적군과 아군 병사들의 장단점을 깊이 살펴 새로 무반(武班)을 설치하고, 주(州)·현(縣)으로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여러 해 동안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무기와 식량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이리하여 예종(睿宗) 【제16대】 2년에 윤관을 원수(元帥)로 삼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다시 여진 정벌에 나섰다. 이때 군대는 모두 17만 명이었으며, 도린포(道鱗浦) 【도련포(都連浦)로 정평(定平)의 북쪽에 있다.】에서 군함을 타고 원정길에 올랐다. 윤관 등은 여진 땅에 도착하여 그 소굴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등 9성(城) 【모두 함경남도 함흥 부근에 있다.】 을 쌓았으며, 비(碑)를 공험(公嶮) 【길주 부근】 에 세우고 경계로 삼았다. 또 국경 남쪽의 민호(民戶)들을 이주시켜 위의 진(鎭), 성(城)들에 살게 하고 개선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왕족으로 하여금 성 밖에서 맞이하게 하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윤관 이하 부하들의 관작(官爵)에 차등을 두어 진급시켰다. 그런데 여진의 추장 우야소(鳥雅束)는 이를 회복하려고 끊임없이 침입했다. 윤관은 세 번째 명령을 받들어 여진을 토벌했는데 목숨을 잃은 장병들이 대단히 많았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9성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여진에게 돌려주기로 논의하여 결정했기 때문에, 윤관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윤관은 예종 6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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