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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코[元寇]

이때 원나라의 원수(元帥)는 흔도(忻都)였고, 좌우(左右) 부원수(副元帥)는 유복형(劉復亨), 홍다구(洪茶丘) 두 사람이었으며, 고려군의 도독(都督)은 김방경(金方慶)이었다. 그 병력 수는 몽한군(蒙漢軍) 2만 5천 명, 고려군 8천 명, 뱃사공 6천 7백 명이었고, 전함은 9백여 척이었으며, 군량(軍糧)과 배의 자재는 모두 고려에서 징발했다. 연합군은 먼저 쓰시마(對馬)와 이키(壹岐)를 공격했으며, 나아가 지쿠젠(筑前)의 하카타(博多)에 접근했지만, 미리 방비를 삼엄하게 하고 있던 일본은 연합군을 물리쳐 격파했다. 때마침 큰 바람이 일어나 전함이 침몰하고, 익사한 사람이 셀 수 없었으며, 흔도, 김방경 등 장수들은 모두 합포로 도망쳐 돌아갔고, 돌아가지 못한 부하들은 1만 3천 5백 명이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

이듬해는 바로 고려 충렬왕 원년으로, 왕은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민력(民力)이 피폐하여 다시는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고 읍소했다. 그 궁핍했던 상황은 상상할 만하다. 그러나 원나라는 평소의 뜻을 이루려고 충렬왕 원년과 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일본에 보내 국서(國書)를 가져왔지만, 그 국서가 무례했으므로 바쿠후(幕府)는 명령을 내려 사신들을 모두 참수함으로써 우리의 결심을 나타냈으며 더욱 방비를 삼엄하게 했다. 원나라는 이전의 패배를 갚지 못하자, 한편으로 고려에 명하여 급히 전쟁 준비를 가다듬도록 했지만, 때마침 충렬왕 5년에는 송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그 기세에 편승하여 일거에 일본을 굴복시키려고 하여, 같은 왕 7년 【일본 고다이고 천황 고오안(弘安) 4년, 원나라 세조 지원(至元) 11년】 에 다시 대군을 동원하여 일본을 침략했다. 이때는 군대를 동로군(東路軍)과 강남군(江南軍)으로 나누었는데, 동로군은 몽고족과 한족 병사 약 3만 명, 고려 병사 약 1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전함은 9백 척으로 흔도, 홍다구 등이 그 장수였고, 김방경이 고려군을 이끌었다. 또 강남군은 만족(蠻族) 병사 10여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전함은 3천 5백 척였는데, 범문호(范文虎) 등이 이들의 장수였다. 범문호는 바로 송나라에 항복한 장수였다. 동로군은 우선 합포를 출발하여 이키를 거쳐 지쿠젠으로 접근했지만, 일본군이 분전하여 원나라 군대는 거듭하여 패배했으며 또한 질병에 크게 시달렸다. 그러는 사이에 범문호가 이끄는 강남군은 시기를 놓쳐 늦게 와서 간신히 합류했으며, 막 동로군과 함께 서둘러 나아가려고 했지만, 때마침 구풍(颶風)이 크게 일어나, 원나라의 함선들은 전복되기도 하고 파손되기도 하여, 익사한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여러 장수들은 도망쳐 돌아갔다. 원나라 군대는 죽은 자가 10만여 명, 고려군은 죽은 자가 7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원나라는 이후에 다시 군대를 일으켜 지난번의 패배를 갚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원사(元史)』·『고려사(高麗史)』·『동국통감(東國通鑑)』】

충렬왕 이후에는 대대로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고, 원나라 이름을 사용했으며, 국왕의 폐위와 즉위도 역시 완전히 원나라의 뜻대로 했다.

원나라는 한때 대단히 강성했지만, 일본을 공격하여 대패하면서부터 국력이 차츰 피폐해져, 자타가 공인하는 대제국도 점차 분열되어 내란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제31대】 5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강남에서 일어나 금릉(金陵) 【남경(南京)】 에서 승리를 거두고, 같은 왕 17년에 마침내 연경(燕京)을 함락시켰으므로, 원나라 순제(順帝)는 막북(漠北)으로 도망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데 불과했다. 원나라는 태조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14대 왕 165년 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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