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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왜구[倭寇]

이른바 왜구(倭寇)는 반드시 일본인만이 아니었고,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의 언어와 풍속을 모방하고 왜구로 가장하여 나쁜 행위를 저지른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짜왜구[假作倭寇]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그 단초가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그 왜구의 폐해가 가장 심하였다는 폐왕 우(禑) 14년에, 관련 기관에서 "화척재인(禾尺才人) 【백정(白丁)과 같은 비천한 사람】 은 농사짓는 일을 하지 않고, 산골짜기에 모여 왜적(倭賊)이라고 사칭(詐稱)한다. 빨리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글을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폐해가 한층 심각하였던 것 같다. 특히 세종 25년에 쓰시마와 조약을 체결하고부터는 왜구의 폐해가 갑자기 사라졌지만, 【본과 비고 「쓰시마(對馬)와의 수교」 참조】 그에 반해 가짜왜구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 기이한 상황이 나타났다. 다음으로 조선 쪽의 가장 신뢰할 만한 사료(史料)인 『이조실록(李朝實錄)』에서 그와 관련된 서너 가지 예증을 살펴볼 것이다.

태조 3년에 명나라 사신은 자문(咨文)을 가지고 와서 나무랐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영해위(寧海衛) 【산동성】 가 조선의 노략질하는 강도[劫賊] 한 명을 잡았는데, 만호(萬戶) 김사언(金寺彦) 이하 259명이 7척의 배에 포(布) 560필을 싣고 탑승하여, 상업적 명목을 가장하여 우리나라의 사정을 정찰하였다. 그 후 또 같은 목적으로 배 10척에 승조원(乘組員) 270명을 파견하였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러한 가짜왜적[假作倭賊]은 사단을 일으키는 자들이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또 이듬해에 명나라 사신인 김인보(金仁甫)가 귀국할 무렵, 조선인이 왜구로 가장하여 요동(遼東) 및 산동성(山東省) 연안을 약탈한 변소(辨疏)한 상주문을 맡긴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가짜왜구는 멀리 중국 연안 지방까지 진출하여 분쟁을 야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28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순몽(李順蒙)은 인민들 가운데 다른 도(道)로 떠돌아다니는 자가 많다고 걱정하여, 호패법(號牌法) 【신분, 성명, 생년월일 등을 표시한 부절】 을 다시 시행하도록 세종에게 올린 글 가운데, “신(臣)이 듣건대, 이전 왕조 말기에 왜구가 왕성하게 활동하여 민생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에 왜인(倭人)들이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국(本國) 백성들이 왜복(倭服)을 지어 입고, 무리를 이루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 세조 2년에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백정(白丁)의 잔인성을 말하면서, 이들을 일정한 장소에 거주하도록 할 것을 임금에게 건의한 내용이 가운데 “이전 왕조 【고려】 시기에 거란이 침입해 왔을 때, 가장 먼저 길을 안내하였으며, 또한 거짓으로 왜구의 모습을 하였습니다. 처음에 강원도에서 일어나 경상도에서 만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수를 보내 그들을 토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도적들이 붙잡히고 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모두 이런 무리들입니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백정들이 가짜왜구가 되어 각지에서 횡행하던 범위가 얼마나 광대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성종 9년에 전라도에서 왜구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적이 있다. 영사(領事) 심회(沈澮) 등은 “우리나라 사람들 중 달아난 자들이 간혹 왜구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도둑질을 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변경의 장수들로 하여금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지사(知事) 이광배(李光培)가 그 말을 반박하여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많은 공을 세우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므로 장수를 파견하여 왜적을 잡지 못하면, 곧 고기잡이하는 왜인들을 강제로 잡아오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틈을 타서 일을 저지르는 자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종 13년에 이의형(李義亨)이 올린 글에도 “제주도의 떠돌이 백성들은 대다수가 진주(晉州), 사주(泗州) 지역에 빌붙어 살면서 바다를 떠도는데, 왜인(倭人)의 언어와 의복을 하고서 침략합니다. 청컨대 본토로 돌려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상을 요약하면 이른바 왜구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약간 과장된 느낌이 있다. 그리고 왜구는 반드시 항상 일본인에 한정된 사람들이 아니고 난폭한 무리들이 자주 왜구라는 이름으로 가장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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