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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女眞) 토벌과 이시애(李施愛)의 난

세종 때, 두만강 안쪽의 땅을 거둬들이고, 6진(鎭)을 설치하여 그곳을 진압하였지만【제2과 비고 「여진과의 관계」 참조】 이후 여진의 움직임으로 갈등이 야기되어, 변경은 항상 평화롭지는 못하였다. 세조 때, 종성(鍾城) 부근의 강 건너 여진족과 불화가 생겨 여진족의 추장이 변방의 장수에게 주살되었으며, 그의 아들 아비차(阿比車)는 동족을 연합하여 여러 차례 회령(會寧) 지방에 침입해 왔으므로, 왕은 신숙주(申叔舟)를 함길도도체창사(咸吉道都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다. 5년 9월에, 신숙주는 먼저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진로를 나누어, 무산(茂山), 【함경북도, 지금의 옛 무산】 운두(雲頭), 【회령의 서쪽】 부령(富寧) 등의 각지로부터 진격하여 여진의 경계로 쳐들어갔으며, 27일 자신은 종성을 출발하여 여진의 본거지로 향하여, 여러 장수들과 함께 그곳을 포위하고, 마침내 소굴을 초토화시키고 돌아왔다. 후에 세조 12년 9월에, 파저강 【앞서 말한 통가강】 의 여진족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여러 차례 요동(遼東) 땅을 침입하였으며, 또한 조선의 의주(義州), 창성(昌城) 등의 땅을 침입하였으므로, 명나라는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였으며, 다시 조선에 칙령을 내려 그들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왕은 이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강순(康純)을 우두머리 장수로 삼아, 병사 만여 명을 이끌고 그들을 정벌하였다. 같은 달에 강순은 압록강을 건너 파저강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여진을 무찌르고,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참수하고 돌아왔다. 【『세조실록(世祖實錄)』·『황명실록(皇明實錄)』·『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이 해 5월에, 길주(吉州) 사람 이시애(李施愛)는 반란을 일으켜 주살되었다. 이시애는 일찍이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있었다. 상(喪)을 당하여 집에 머물고 있었지만, 몰래 다른 뜻을 품었으며, 마침내 동생인 시합(施合)과 모의하여 병사(兵使) 강강문(姜康文), 길주목사(吉州牧使) 허징(許澄) 등을 죽이고, 주(州)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함흥 이북의 주(州), 군(郡)은 이에 호응하여, 모두 수령을 죽이고 앞다투어 그에게 항복하였다. 관찰사 신면(申㴐)은 항거하여 싸웠지만, 이겨내지 못하고 역시 살해되었다. 왕은 이에 허종(許悰)을 절도사로 삼아, 회령부사 어유소(魚有沼), 절제사(節制使) 강순(康純) 등과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먼저 가서 그들을 토벌하였으며, 이어서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함길, 강원, 평안, 황해 4도(道)의 도총사(都摠使)로 삼았는데 구성군은 10만 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나중에 출발하였다. 허종 등은 나아가 홍원(洪原), 북청(北靑) 【이상 함경남도】 등지에서 이시애의 군대와 싸웠으며, 만령(蔓嶺)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에 이르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시애는 달아나 길주로 돌아갔으며, 여진으로 도망치려고 하였지만 도착하기 전에 붙잡혀 진영 앞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떠도는 “한명회, 신숙주 등은 이시애와 내통하였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에 왕은 한명회 등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지만 곧 모두 용서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기재잡기(寄齋雜記)』·『조야첨재(朝野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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