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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諺文)

언문(諺文)은 세종 28년에 반포되었다. 이보다 먼저 세종은 여러 나라들은 각자 문자를 만들어 그 나라의 말을 기록하는데 오로지 조선에 고유한 문자가 없음은 매우 유감이라고 하여, 친히 언문을 만들고, 언문과 관련된 부서를 궁궐 안에 개설하여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등에게 명하여 언문과 관련된 것을 토의하게 하였다. 또 예의(例義)를 덧붙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하여 나라 안에 공포하였다. 이때 성삼문 등은 음운(音韻)이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기 위해, 당시 귀양에 처해져 요동(遼東)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의 허락을 받으러 왕래한 것이 실로 13번이나 되었다고 한다. 언문은 정확히는 그것을 정음(正音)이라고 하고, 그 예의(例義) 즉 해설을 훈민정음이라고 한다는 것은,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서문」의 “우리의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한 예와 뜻으로 그것을 보이시고, 그것을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之曰訓民正音】 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언문이라는 것은 한자(漢字)에 대해 통속문자(通俗文字)라는 뜻으로, 바로 중국의 언어에 대해 조선어를 조선인 스스로가 방언 이어(方言俚語)로 칭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의 언문은 자모(子母) 28자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중 3자는 사라져 오늘날에는 25자만 사용되고 있다.

언문 제정(製定)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것으로 크게 편리함을 느끼게 되었지만, 반포 당시에는 그것이 불편하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언문이 반포되기 2년 전에, 당시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이 “언문은 신기한 하나의 재주에 불과하여 학문에 손해이고 다스리는 데에 이로움이 없다.”라고 하여,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 때문에 왕의 견책을 받은 것 같지만, 그것의 확실한 사례는 없다.

언문의 기원에 관해서는 종래에는 옛날 전서(篆書)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 외에 범자(梵字) 기원설이나 몽고자(蒙古字) 기원설 【특히 파스파(巴思八) 문자】 및 발음기관들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형(象形) 기원설 등이 옛날부터 있는데 아직 결정을 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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