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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天文)

세종 임금은 천문(天文)에 밝았는데, 14년에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 정인지(鄭麟趾)에게 명하기를, “우리는 동쪽 먼 곳의 해외에 있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오로지 화제(華制) 【중국의 제도】 를 준수한다. 다만 하늘을 관측하는 기계는 빠져 있다. 경(卿)은 대제학 정초(鄭招)와 고전(古典)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의표(儀表)를 창조함으로써, 조사하고 측량하는 데 대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원(元)나라의 제도를 연구하고, 이천(李蕆)과 장영실(蔣英實) 두 사람은 장인들을 감독하였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장영실이 가장 착상이 뛰어나, 7년이 걸려 북극측정기(北極測定器)와 여러 종류의 일구(日晷), 【해의 위치로 시각을 알 수 있는 기계】 누각(漏刻) 【물시계】 등을 제작하였다. 특히 경복궁 안에 설치된 흠경각(欽敬閣)이 유명한데, 이 건물의 중앙에는 종이를 풀칠하여 높이 7척(尺)의 산(山)을 만들고, 그 안쪽에 수력윤전기(水力輪轉機)를 갖춘 옥루(玉漏) 【물시계】 한 개를 설치해 놓았다. 또 금으로 만든 해가 있어 하루 밤낮 사이에 이 산을 한 바퀴 돌고, 그것이 운행하는 모양은 그것을 태양에 합쳐 놓았으며, 주위에는 방위(方位)를 나타내는 신상(神像)들을 배치해 놓았고, 각종 인형들이 자동적으로 시각을 알려 주었다. 그 밖에 종이로 만든 산의 사방 주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경치를 모형으로 나타냈는데, 백성들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그 구조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세종 15년에는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로운 천문도를 그려 그것을 돌에 새기게 하였다. 같은 해에 또한 정인지, 정초, 정흠지(鄭欽之) 등에게 명하여, 원나라의 역법(曆法)을 기준으로 삼고, 명나라의 역법을 참작하여 칠정력(七政曆)을 편찬하게 하여, 이를 나라 안에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 등에게 명하여 회회력(回回曆)을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 이순지와 김담은 모두 당시 천문에 통달하여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세종 24년에 명을 내려 동(銅)으로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었다. 길이는 1척(尺) 5촌(寸)이고 직경은 7촌 【주(周)나라 척도를 이용하였다.】 이었다. 돌로 대(臺)를 만들어 그 위에 설치하였다. 한 기는 서운관(書雲觀) 【천문, 지리, 역서(曆書), 측후(測候) 등을 담당하였다.】 에 설치하여, 비가 올 때마다 그 깊이를 측량하게 하였다. 각 도(道)에는 동으로 주조한 측우기를 한 개씩 보냈고, 다시 그것을 표준으로 하여 자기(磁器) 또는 와기(瓦器)로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여, 그것을 객사(客舍)의 마당 안에 설치하고, 장부를 비치하여 비의 양을 기입하도록 하였다.

또 세종 때, 강화도(江華島)의 마니산(摩尼山), 갑산부(甲山府)의 백두산(白頭山), 제주도(濟州道)의 한라산(漢拏山)에 따로 역관(曆官)을 파견하여, 그 지역의 북극(北極) 고도를 측정한 적이 있었지만, 그 도수(度數)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상은 세종 때, 천문(天文)과 역수(曆數)에 관해 시행하고 설치하였던 사항들의 대요(大要)이다. 이것으로 어떻게 당시 천문 지식이 발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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