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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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5.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 비고(備考)
  •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

연산군은 이름은 융(㦕)이고, 성종(成宗)의 장자(長子)이다. 세자(世子)일 때부터 매일 유희(遊戱)를 일삼고, 마음을 공부에 두지 않았는데, 즉위해서는 급기야 정치를 게을리하고 행동은 무도(無道)하였다. 즉위 후 4년에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 서로 배격하여 죄에 빠뜨려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고, 이어서 10년에, 왕은 생모 윤씨(尹氏)의 폐사(廢死)를 슬퍼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비고 2 「사화」 참조】 또 윤씨의 폐사는 성종의 귀인(貴人) 엄씨(嚴氏) 및 정씨(鄭氏)의 모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믿고 두 숙의(淑儀)를 내정(內庭)에서 때려서 죽이고, 아울러 정씨가 낳은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봉안군(鳳安君) 봉(㦀)를 살해하였다. 이때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의 아버지로 추존(追尊)된 덕종(德宗)의 비, 즉 연산군의 조모(祖母)】 는 병상에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서 그 난폭함을 나무라자, 연산군은 분노하여 머리로 대비를 들이받았고 대비는 마침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얼마 못 가서 숨을 거두었다.

이 해 봄에 여러 도(道)의 각 읍(邑)에 기악(妓樂)을 설치하고, 채홍준사(採紅駿使) 【미녀와 좋은 말을 찾아내는 사람】 와 채청사(採靑使) 【소녀(少女)를 찾아내는 사람】 를 각 도에 파견하여 미녀(美女)와 양마(良馬)를 찾아내게 하였다. 11년에 홍문관(弘文館)을 폐지하고, 사간원(司諫院)을 개혁하였으며, 또한 성균관(成均館)을 연회를 베풀고 즐기는 장소로 삼고, 그 서생들을 내보냈으며, 음사(淫祠)를 그 안에 설치하고, 무격(巫覡)을 불러 모으는 등 그릇된 행실이 나날이 심해졌다. 12년에 전(前) 이조 참판 성희안(成希顔),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 등이 협의하여, 성종의 차자(次子)인 진성대군(晉城大君) 역(懌)을 옹립하고, 자순대비(慈順大妃) 윤씨(尹氏) 【성종의 계비】 의 교지(敎旨)로써 왕을 폐위하고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喬桐) 【경기도 강화도의 서쪽에 있는 섬】 에 살게 하였다. 역(懌)은 왕위에 올랐으며, 그를 중종(中宗)이라고 한다. 그 해 11월에 연산군이 세상을 떠나자, 왕은 예의를 갖추지 않고 단지 왕자인 군(君)의 예로써 그의 장례를 치렀다. 공조참의(工曹參議) 유숭조(柳崇祖)는 글을 올려, 묘(廟)를 세우고 시호를 올릴 것을 청원하였으므로, 중종은 폭넓게 여러 신하들을 모아 그것을 논의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자, 유숭조의 청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사재척언(思齋摭言)』·『동각잡기(東閣雜記)』·『조야첨재(朝野僉載)』·『조야집요(朝野輯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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