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5.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 비고(備考)
  • 사화(士禍)
  • 무오사화(戊午士禍)

무오사화(戊午士禍)

처음에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이 김종직의 일파에게 원한을 품고 몰래 배척하여 죄에 빠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그 해 4월에 사국(史局)이 열리고 『성종실록(成宗實錄)』이 편찬되는 가운데, 이극돈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사관(史官)이던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 가운데에 김종직이 의제(義帝)를 애도하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은근히 세조(世祖)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진(秦)나라 말기에,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함께 일어나 모두 초(楚)나라 회왕(懷王)을 받들고, 진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항우는 몰래 야심을 품고 겉으로는 회왕을 존중하여 의제(義帝)라고 부르다가, 스스로 일어나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 되었으며, 후에 사람을 시켜 의제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항우를 세조에, 의제를 단종(端宗)에 비유한 것이다.】 유자광, 노사신(盧思愼) 및 윤필상(尹弼商) 등으로 하여금 사초의 내용을 임금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주색(酒色)에 빠져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김종직의 무리들을 미워하였으므로, 곧 그 말을 듣고 직접 김일손 등을 국문(鞫問)할 것을 명하였다. 이리하여 유자광은 김종직의 문인(門人)들 및 그들과 관계가 있는 자들을 붙잡아 그들을 모두 형에 처하였으며, 김종직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그의 관을 쪼개어 시신을 꺼내어 참수하였다. 이 사건은 연산군 무오년(戊午年)에 일어났으므로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도 부르며, 또한 그 단초가 역사의 편찬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사화(史禍)라고도 부른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