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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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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甲子士禍)

이로부터 6년이 지나 연산군 10년 【갑자년】 에 이르러 사화가 또 일어났다. 애초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 【성종의 계비】 는 부덕으로 폐위되고 사약을 받았다. 당시 연산군은 아직 어려서 그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즉위한 후 생모의 죽음에 대해 듣고 크게 비통해하여, 10년 4월에 윤씨를 추존하여 왕후(王后)라고 하였으며, 또한 폐사(廢死)의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에 대해 죄를 따져 물으려고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비(妃)인 신씨(愼氏)의 오빠인 신수근(愼守勤)은 정권을 쥐고 있었는데 사림(士林)의 명성이 떠들썩한 것을 싫어하여 그것을 물리치려고 사림들이 국사(國事)를 비방하여 논의한다고 무고하였다. 이리하여 사화가 다시 일어났는데, 이른바 명사(名士)들 중 죄인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인 중 이미 죽은 그의 사람은 관을 쪼개어 시신을 베고, 뼈를 부수어 강물에 버렸다. 이를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한다. 이렇게 연산군은 비행(非行)이 심하였으므로 폐위되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晉城大君) 역(懌)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중종(中宗) 【제11대】 이다. 왕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분발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활발히 펼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명사인 조광조(趙光祖) 【호는 정암(靜庵), 제4과 비고 「조선시대 초기의 학자」 참조.】 를 등용하고 그를 깊이 신임하였다. 조광조는 김굉필(金宏弼) 【김종직의 문인으로 호가 한훤(寒喧)이다.】 의 문하에서 학문 수업을 받았으며, 당시 사림의 우두머리였는데 왕은 그의 말에 따라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비들을 등용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잇달아 발탁되고 나이가 어린 의기 있는 선비들은 의기양양하여 점차 주위의 질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 또한 싫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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