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5.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 비고(備考)
  • 외척(外戚)의 전횡과 왕권의 쇠퇴

외척(外戚)의 전횡과 왕권의 쇠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정 신하들 간의 질시와 배척은 연산군 【제10대】 때부터 심해졌다. 중종 【제11대】 때부터는 그에 더하여 외척(外戚)들 간의 다툼으로 왕권이 쇠약해졌으며, 명종 【제12대】 때에는 더욱 복잡한 사정으로 왕권은 점점 쇠약해졌다.

중종 14년에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주살된 후에는 그들을 무너뜨린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은 정치를 마음대로 주물렀으며, 18년에 남곤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일파는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제거되고, 김안로의 무리들이 대신 정권을 좌우하였다. 김안로는 29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서 좌의정이 되었지만, 전횡하여 여러 차례 큰 옥사(獄事)를 불러일으켜, 빈번히 종실과 중신(重臣)들을 주살하거나 귀양을 보냈다. 확실히 그는 그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낳았으며, 세자 호(峼)의 이모】 과 결혼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애초 중종이 연산군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자, 중종의 비(妃)인 신씨(愼氏) 즉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연산군의 출위(黜位)와 동시에 폐위되고,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는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며 신수근의 누이는 연산군의 비이다. 신수근은 연산군이 폐위될 때 죽임을 당하였다. 신수근에 관해서는 비고 2 「사화(士禍)」 항목 참조】 중종은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를 계비(繼妃)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중종 30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중종은 다시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를 맞아 계비로 삼았다. 단경왕후는 후사(後嗣)가 없었지만 장경왕후는 세자 【호(峼), 인종】 를 낳았고, 문정왕후는 둘째아들 환(峘) 【명종】 을 낳았다. 김안로가 세력을 얻었을 때는 장경왕후는 이미 세상을 떠나, 형세가 매우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세자 호의 누이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김안로는 문정왕후를 폐위시킬 계략을 세웠다. 때문에 왕은 그를 미워하여 외척인 윤임(尹任) 【장경왕후의 오빠】 및 윤안인(尹安仁) 【문정왕후 친족의 아들】 등과 논의하여 마침내 김안로를 죽여 없앴다. 이때가 중종 32년이었다.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모두 개혁하여 그 초기의 정치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 많았지만, 기묘사화가 일어나 수많은 현사(賢士)들을 죽이고 귀양을 보냈으며, 그 후에는 남곤, 김안로 등의 간신들이 교대로 권력을 농단하였지만,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후 김안로가 제거되었지만, 세자 호(峼)의 외숙인 윤임 【장경왕후의 오빠】 과 둘째 아들 환(峘)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문정왕후의 동생】 은 각자 자신의 주군을 임금으로 옹립하려고 서로 맞서 배척하면서 두 당(黨)이 물러서지 않았으며,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중종 말년의 모습이다.

이처럼 조정 신하들 간의 투쟁은 완전히 변하여 외척 간의 불화로 비화하였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仁宗) 【휘(諱)는 호(峼)】 이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고작 8개월이 지나 역시 세상을 떠났으며, 왕의 아우인 명종(明宗) 【휘는 환(峘)】 이 대신 즉위하자, 윤임 등의 일파는 윤원형 등에게 패배하고, 정권은 완전히 윤원형의 수중에 들어갔다. 윤임 등이 제거된 것은 바로 명종이 즉위한 해, 즉 을사년(乙巳年)으로 【본과 비고 2 「사화(士禍)」 참조】 그 후 50~60년간 윤원형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온갖 죄명을 씌워 모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으니, 그 수가 약 백 명에 가까웠다. 그리고 윤원형의 복심(腹心)이 되어 그를 도운 사람들은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등이었다. 그런데 명종은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고작 12세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외숙 윤원형이 힘써 받들었으므로, 모후의 외척이 권력을 농단하는 일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는 뒤에서 설명하는 붕당(朋黨)과 함께 조선 시대 중기 이후의 커다란 폐단이 되었으며, 왕권은 이로 인해 점차 쇠약해졌다. 이처럼 명종의 치세 기간은 모후와 그의 동생 윤원형 두 사람의 전횡이 극에 달해 왕은 있으나 마나 하였으므로, 왕은 그들을 매우 싫어하여 이량(李樑) 【왕비의 아버지인 심강(沈鋼)의 처남】 을 발탁하여 윤원형에 대항하게 하였다. 이에 이량은 임금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이조판서가 되자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림(士林)들을 제거하려고 하여, 하마터면 사화가 일어날 뻔하였는데, 심강의 아들 심의겸의 이를 막아 이량을 제거하여 사림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윤원형은 명종 20년 4월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 세력이 급격히 쇠약해졌으므로, 8월에 탄핵을 받고 관작이 삭탈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그러나 왕도 역시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상과 같이 조정 신하들과 외척들은 모두 권세를 얻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서로 양보 없이 배격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그 결과 왕권이 크게 쇠약해짐에 따라 마침내 다음 왕인 선조 때에 이르러 붕당의 분쟁이 해결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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