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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론(老論), 소론(少論)의 다툼

노론(老論), 소론(少論)의 다툼

숙종 9년에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태조에게 시호를 내리려고 하자,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등이 반대하였으며, 그 결과 마침내 서인은 노론(老論) 【송시열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 과 소론(少論) 【박세채와 윤증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 의 두 파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14년 10월에, 왕의 총희(寵姬)인 장소의(張昭儀)는 왕자 균(呁)을 낳고, 이듬해 정월에 왕은 균을 원자(元子)에 봉하였으며, 또한 장소의의 지위를 높여 희빈(禧嬪)으로 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원자 책봉이 아직 이르다고 간(諫)하였으며, 송시열도 역시 상소를 올려 그렇게 주장하였기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샀다. 남인이 이 틈을 이용하여 북인을 공격하여 송시열은 마침내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는 도중에 정읍(井邑) 【전라남도】 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리하여 서인은 모두 축출되고 남인은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숙종 20년에 이르러 왕은 지난 과오를 후회하여 모든 남인들을 물리치고, 소론파(少論派)들을 정승에 임명하고 다시 많은 서인들을 기용하였다. 이후 대체로 서인들은 노론과 대립하게 되어 형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하는 제 과 비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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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야첨재(朝野僉載)』·『조야집요(朝野輯要)』·『석담일기(石潭日記)』·『율곡전집(栗谷全集)』·『조야회통(朝野會通)』·『일월록(日月錄)』·『국조보감(國朝寶鑑)』·『청야만집(靑野漫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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