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5.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 비고(備考)
  • 삼포(三浦)의 난(亂)과 여진(女眞)의 침범
  • 삼포(三浦)의 난(亂)

삼포(三浦)의 난(亂)

세종 때에 쓰시마(對馬) 사람들을 위해 삼포를 개항하여, 무역을 하고 고기를 잡도록 하였으며, 또한 도주(島主)와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서술하였다. 【제2과 비고 「쓰시마와의 관계」 참조】 처음의 규정에는 쓰시마에서 오는 사람들은 무역이나 고기잡이의 일을 마치면 곧장 돌아가야 한다고 정해 놓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주(永住)하는 사람이 생겨나 그 숫자가 차츰 증가하였다. 세종 16년에 왕은 예조(禮曹)로 하여금 쓰시마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서한을 보내, 이들을 모두 소환하도록 교섭하게 하고, 단지 그들 중 가장 오래 거주한 60명에게만 특별히 임시로 잔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 후 거류민은 다시 증가하여 세조 11년에는 아래와 같이 많은 숫자를 헤아리게 되었다.

 제포(薺浦)   호(戶) 300, 인구 1200여 명

 부산포(釜山浦) 호 110, 인구 330여 명

 염포(鹽浦)   호 36, 인구 120여 명

조선 정부는 혹시 거류민들이 화(禍)를 야기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소 사다모리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을 송환할 것을 압박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중종 때에 이르러 호구(戶口)는 점점 늘어났다. 이때 조선의 진장(鎭將) 등은 거류민을 적절히 통제할 능력을 잃었으며, 특히 부산첨사(釜山僉使) 이우회(李友會)는 무모하게 오로지 위력으로 협박하여 따르도록 하려 하였으므로, 거류민들은 모두 그를 원망하여 숨어서 기회가 오기를 노렸다. 마침 쓰시마 도주 소 요시모리(宗義盛)는 조선이 세견선(歲遣船)을 야박하게 대우하고, 접대(接待)를 예(例)와 같이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그의 아들 소 모리히로(宗盛弘)를 보냈는데 그는 병력 3백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거류민들은 이 기회를 틈타 일을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중종 5년 4월 4일에 거류민들은 부산(釜山) 【지금의 부산부(釜山府) 부산진(釜山鎭)】 과 제포(薺浦) 【지금의 창원군(昌原郡) 제포리(薺浦里)】 의 두 진성(鎭城)을 습격하고, 부산첨사 이우회를 살해하였으며 제포첨사(薺浦僉使) 김세균(金世均)을 사로잡고, 더 나아가 웅천(熊川)과 동래(東萊)의 두 성을 공격하였다. 웅천현감(熊川縣監)은 성을 포기하고 달아났으므로 웅천은 마침내 함락되었지만, 동래를 포위한 한 부대는 병력이 적어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소식이 잇달아 왕도(王都)로 날아들었다. 왕은 크게 놀라 황형(黃衡) 【전(前) 승지(承旨)】 과 유담년(柳聃年) 【병조판서】 을 좌·우도방어사(左右道防禦使)로 삼아 우선 출발시켰으며, 다시 좌의정 유순정(柳順汀)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병조판서 안윤덕(安潤德)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그 뒤를 잇도록 하였다. 이때 유순정이 가기를 어려워하며 우의정 성희안(成希顔)을 천거하였는데, 성희안도 역시 사양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으므로, 왕은 특별히 유순정에게 출정하도록 명을 내렸다. 또 안윤덕은 출정 명령을 듣고는 두려워하여 시간을 끌면서 나가지 않았으며, 먼저 간 군대의 전황(戰況)을 기다리다가 10일이 지나서야 점차 출발하였다. 이로부터 당시 얼마나 사기(士氣)가 떨어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순정, 안윤덕 등이 아직 도착하기 전에 황형, 유담년 등이 나아가 싸워 적군을 격퇴하여, 웅천성 및 제포의 진성(鎭城)을 되찾고, 소 모리히로는 전사하였으므로, 거류민들의 대부분은 도망쳐 쓰시마로 돌아가, 겨우 10여 일 만에 사태는 평정될 수 있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조야첨재(朝野僉載)』·『음애잡기(陰崖雜記)』·『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종씨가보(宗氏家譜)』·『쓰시마편년략(對馬編年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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