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5.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 비고(備考)
  • 삼포(三浦)의 난(亂)과 여진(女眞)의 침범
  • 여진의 침범

여진의 침범

삼포의 난을 겪은 지 8년, 중종 13년에 이르러 북쪽 변경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보다 먼저, 함경도 회령부(會寧府) 성 밑의 여진족은 다른 부족과 함께 갑산부(甲山府)를 침범하여 많은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였다. 이 때문에 남도병사(南道兵使)의 은밀한 보고에 따라 군대를 보내 그들을 불시에 공격하려 하였지만, 부제학 조광조(趙光祖)는 그 일이 속임수로서, 바르지 않은 일이라고 주장하여 간하였으므로, 왕은 갑자기 그것을 중지하였다. 이어서 중종 18년에 평안도의 폐지된 군(郡)인 여연(閭延)과 무창(茂昌)의 경계 내에 여진인들이 와서 거주하여 점차 부락을 이루게 되었는데 강계부사(江界府使)는 군대를 보내 그들을 몰아냈지만, 중종 23년 정월에 만포첨사(滿浦僉使) 심사손(沈思遜)이 땔나무를 벌채하기 위해 경계를 넘었다가 여진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왕은 노하여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으며 대부분이 그것을 찬성하였지만, 좌의정 이행(李荇)만이 홀로 불가하다고 하여 토벌 계획은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후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에도 여전히 여진인들이 변경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선조 16년에는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은 여러 장수들을 세 경로로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부락을 공격하고, 소굴을 불질러 없애고 돌아왔다. 【『정사촬록(政事撮錄)』·『일월록(日月錄)』·『조야첨재(朝野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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