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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임진란(壬辰亂)
  • 비고(備考)
  • 임진(壬辰)·정유란(丁酉亂) [분로쿠(文祿)·게이죠(慶長) 역(役)] 의 경과
  • 임진란(壬辰亂) [분로쿠 전후(前後)] 의 경과

임진란(壬辰亂) [분로쿠 전후(前後)] 의 경과

【본문의 월일(月日)은 일본력(日本曆)에 따른다. 명나라 역법을 받들던 조선과는 달[月]에서 날[日]을 취하여 서로 다르며, 그 주요한 것만 대조하여 병기(倂記)한다.】

부서(部署)

분로쿠(文祿) 원년 【조선 선조 25년】 정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장수들에게 명나라를 원정할 군대를 출동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먼저 해군, 육군 등 제군(諸軍)의 여러 부서를 정하고, 또한 명령을 내려 군의 폭력적 약탈을 금지하고, 결코 조선의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 전쟁에 동원된 병력의 수는 다음과 같다.

 갑 나고야(名護屋) 주둔군

   히데요시(秀吉) 휘하 약 3만 명

   주둔 제군(諸軍) 【46명의 장수】 약 7만 명

   합계 약 10만 명.

 을 도선군(渡鮮軍)

   선발군(先發軍) 9군 【29명의 장수】 약 15만 명

   증견군(增遣軍) 【37명의 장수】 약 4만 명

   수군(水軍) 【11명의 장수】 약 1만 명

   합계 약 20만 명

   총계 약 30만 명

 이때 히데요시가 조선으로 건너가는 여러 군대[渡鮮諸軍]에게 발포한 금지령은 다음과 같다.

   금제(禁制)     고려국(高麗國)

 1. 군대 갑(甲)과 을(乙)의 사람들은 산만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혼란을 일으키는 것.

 1. 방화.

 1. 지하에 있는 사람이나 백성들에게 법도에 어긋나는 예의를 보이는 일.

 위의 조항들은 분명히 중지할 것을 명하며, 만약 이를 위반하는 무리들이 있을 경우에는 신속히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텐쇼(天正) 20년 정월 일 【히데요시 주인(秀吉朱印) 『적번벌열록(荻藩閥閱錄)』·『가토 기요마사가 장서(加藤淸正家藏書)』·『부카지키(武家事記)』·『텐쇼키(天正記)』】

육군(陸軍)의 경과(經過)

제1군의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소 요시토시(宗義智), 마츠라 시게노부(松浦鎭信) 등과 군사 1만 8천여 명을 이끌고 분로쿠(文祿) 원년 【조선 선조 25년】 4월 13일 【조선 14일】 에 부산에 상륙하여, 당일 부산성(釜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서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 양산(梁山)을 빼앗았으며 밀양(密陽)을 항복시켰는데, 진군하면서 방(榜)을 세워 군사들의 폭력과 약탈을 금지함으로써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18일에 제2군의 장수 가토 기마사(加藤淸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라 요리후사(相良賴房) 등은 부산에 상륙하여 양산에 당도하였으나, 유키나가가 밀양에서 상주(尙州)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진로를 바꾸어 언양(彦陽)을 공략하였으며, 20일에 경주(慶州)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제3군의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도 역시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와 안골포(安骨浦)에 접근하여, 김해성(金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8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밀양으로부터 진격하여 상주에 이르러,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과 싸워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이어서 함창(咸昌)과 문경(聞慶)을 빼앗고,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들어섰으며,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과 탄금대(彈琴臺)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다. 신립은 패주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 【27일】 가토 기요마사도 역시 경주로부터 영천(永川)과 신령(新寧)을 거쳐 풍진(豐津)을 건너 유키나가와 충주에서 만났는데, 【28일】 두 장수는 다시 진로를 나누어 유키나가는 여주(驪州)로부터 한강을 건너 용진(龍津)의 경로로 나아갔고, 【5월 1일】 기요마사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을 거쳐 경성(京城)으로 향하였다. 【2일】 이보다 앞서 히데요시는 도선군(渡鮮軍)에게 명하여 확실하게 병사들의 약탈을 금지하였지만, 이때에 이르러 선봉의 여러 장수들에게 다시 명령을 내려, 힘써서 조선의 백성들을 안심시키도록 하였다. 【4월 26일】 이때에 국왕은 일이 위급해지는 것을 보고, 갑자기 도성을 나가 평양으로 피하고, 【4월 29일, 조선력으로는 4월 30일】 우의정 이양원(李陽元),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등으로 하여금 남아서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5월 2일에 기요마사의 군대가 공격하여 한강에 이르자, 이양원과 김원명은 모두 성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달아났으므로, 기요마사는 마침내 강을 건넜다. 이날 유키나가의 군대도 역시 양근(楊根)에서 용진을 건너 진격하여 경성의 동쪽으로 나아갔고, 유키나가는 이날 밤 곧바로 동대문에서 성 안으로 들어갔으며, 기요마사는 다음날 남대문으로 들어갔는데, 두 장수는 상의하여 진(陣)을 성 밖으로 옮겼으며 방(榜)을 세워 백성들을 안심시키려 하였다. 【5월 5일】 이에 앞서 구로다 나가마사는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제4군의 주장(主將)】 와 병력을 합쳐 서쪽 노선으로부터 진격하였는데, 지나가는 곳의 성루(城壘)를 수리하고 수비를 두었으며, 5월 8일에 이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제8군의 주장】 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제6군의 주장】 등의 장수들과 서로 이어서 도성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여러 장수들이 서로 만나 8도(八道)의 통치와 공략에 대한 분담을 논의하여, 유키나가는 평안도를, 기요마사는 함경도를, 나가마사는 황해도를, 요시나리는 강원도를 맡았으며, 히데이에는 남아서 경성을 지키기로 하였다. 15일에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두 군대는 진격하여 임진강에 도달하였으며, 조선의 장수 김명원과 강을 사이에 두고 서도 마주하였는데, 유키나가는 소 요시토시의 가신(家臣)인 야나가와 노리노부(柳川調信)로 하여금 몰래 편지를 조선군에게 던져 화의를 요구하였다. 18일에 조선군은 일본군이 수비를 게을리하는 것을 엿보아 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조선의 장수 신길(申硈)과 유극량(劉克良)은 전사하였다. 27일에 조선군의 수비가 무너지자 일본군은 강을 건너 북쪽으로 추격하여 개성(開城)을 함락시켰다.

6월 1일에 일본군의 여러 장수들이 개성을 출발하여, 안성역(安城驛) 【황해도】 에 도달하였으며, 기요마사는 나가마사와 유키나가의 여러 장수들과 길을 나누어 북쪽의 함경도로 갔다. 이때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스릴 방책을 정하려고 몸소 막 바다를 건너오려다가 갑자기 멈추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마츠다 나가모리(增田長盛),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隆)를 파견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명나라로 진입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힘써 조선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조세를 징수하며, 동시에 진영(陣營)을 지어, 이듬해의 친정(親征)을 대비하도록 하였다. 【6월 3일】 11일에 왕은 일본군이 점차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처를 평양에서 의주로 옮겼지만, 이때 이미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은 진격하여 대동강에 이르러 조선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이때 유키나가는 요시토시와 모의하여 승려 겐소(玄蘇)·야나가와 노리노부를 보내 대사헌(大司憲) 이덕형(李德馨)과 강물 위의 작은 배 안에서 만나, 길을 빌려줄 것을 말하고 화의를 요구하였지만 합의하지 못하였다. 14일 이른 새벽에 조선군은 몰래 강을 건너 요시토시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와서 도와 요시토시와 힘을 합쳐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승리에 편승하여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켰다. 【6월 15일】 이보다 먼저 조선의 국왕은 임진강에서의 패배 후 곧바로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위급함을 알리고, 이어서 이덕형을 청원사(請援使)로 삼아 도움을 구하였는데, 평양이 함락되자 다시 사신을 요동에 보내 출병(出兵)을 촉구하고, 또한 명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청하고, 6월 23일에 의주(義州)의 용만관(龍灣館)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명나라는 옛날에 류큐(琉球)와 조선 등이 보낸 보고를 받고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정벌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본군이 마침내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접하자, 곧바로 요동 및 산동(山東)에 명하여 요지(要地)의 방비를 엄중히 하도록 하였다. 또한 요동진무(遼東鎭撫)에게 명하여 정예부대 2개 부대를 조선의 국경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6월 7일에 유격(遊擊) 사유(史儒)와 참장(參將) 대조변(戴朝弁) 등은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을 출발하여, 15일에 강을 건너 의주에 머물렀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이 일본군을 안내하지 않는가 의심하여 구원에 대한 조정 신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만이 구원을 주장하였지만, 그 후 조선으로부터 청원하는 사절이 여러 차례 오자, 마침내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병력 5천 명을 이끌고 사유 등을 독려하여 조선에 들여보냈다. 조승훈 등은 이에 진격하여 평양에 다다랐지만 유키나가 등에게 격파되어, 사유는 전사하고 조승훈은 달아나 요동으로 돌아갔다. 【7월 15일】 이보다 앞서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 등은 함경도를 평정하고, 6월 24일에 영흥(永興)에 이르렀는데,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珒), 순화군(順和君) 보()】 가 도망쳐 북경(北境)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요마사는 나오시게를 영흥에 남겨두고 요리후사와 병력을 데리고 그들을 쫓았다. 북도병사(北道兵使) 한극성(韓克誠)은 6진(鎭)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에 맞서 해정창(海汀倉)에서 싸워 대패하였다. 【7월 18, 19일 무렵】 기요마사는 멀리 추격하여 회령(會寧)에 이르자, 아전인 국경인(鞠景仁) 등은 두 왕자 및 종신(從臣)들을 모아 항복하였으므로, 기요마사는 성 안으로 들어가 왕자와 신하들을 만나서 그 포박을 풀어 주고 환대하였으며, 그들을 경성(鏡城) 【함경북도】 으로 옮기고 병사들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7월 23일, 조선력으로는 7월 24일】 여러 책들에서 기요마사가 두 왕자와 종신들을 환대한 기사가 보이지만, 그중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한 구절을 아래에 기재하고자 한다.

국경인(鞠景仁)은 문서로 기요마사에게 보고하였다. 기요마사는 회령부에 이르러 진(陣)을 성 밖에 치고, 홀로 수레에 타고 성으로 들어가서 왕자와 신하들을 만났다. 국경인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들은 너의 국왕의 친자식 및 조정의 재신(宰臣)들이다. 심한 모욕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왕자와 신하들의 포박을 풀고 군중(軍中)에 두었으며 식사와 물품의 제공이 매우 후하였다.

이때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영흥에 있으면서 부근의 여러 읍들을 항복시키고, 나아가 함흥(咸興)으로 들어갔으며, 【7월 21일】 8월 13일에 정평(定平)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마침내 장수들을 여러 부서로 나누어 홍원(洪原), 영흥 등의 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조세를 징수하고 법률로써 금지사항을 정하여 영구히 주둔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앞서 모리 요시나리는 강원도를 평정하고 삼척(三陟)에 있었다. 구로다 나가마사도 역시 황해도를 공략하고 해주(海州)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전(前) 해주관찰사(海州觀察使) 조인득(趙仁得) 등이 군대를 일으켜 봉기하였으므로, 나가마사가 격렬히 싸워 그들을 격파하였다. 【8월】

가토 기요마사는 회령으로부터 진격하여 북쪽의 우량하(兀良哈) 【지금의 간도(間島) 국자가(局子街) 부근】 로 들어가,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으며, 이어서 군대를 돌려 다시 회령에 도착하여, 두만강 연안의 여러 읍들을 평정하고 경원(慶源)에 이르렀으며, 북도병사 한극성을 사로잡아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에 여러 장수들을 여러 부서(部署)로 나누어 길주(吉州), 단천(端川) 등의 여러 성들을 지키게 하고, 마침내 두 왕자를 안변(安邊)으로 데려갔다. 10월에 홍원, 함흥, 영흥 등의 주민들이 봉기하여 그 세력이 창궐하여 극에 달하였다.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나아가 싸워 그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11월에 거처인 함흥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길주에서도 역시 북도평사(北道評事) 정문부(鄭文孚) 등이 군대를 일으키자, 기요마사는 사자(使者)를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므로, 나오시게는 즉시 군대를 나누어 그를 지원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명나라는 군대를 일으켜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대장으로 삼아 조선을 도왔는데, 송응창은 요동에 머물렀고 이여송은 세 진영의 병력 4만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의 유격장군(遊擊將軍) 심유경(沈惟敬)과 화의를 체결하기로 하였으므로, 명나라 군대에서 사신이 도착하자, 가신(家臣) 다케우치 기치베(竹內吉兵衛) 이하 20여 명을 파견하여 그들을 순안(順安)에서 맞이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속이고 술을 마시게 하고는 갑자기 일어나 그중 10여 명을 살해하고 여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분로쿠(文祿) 2년 정월 4일, 조선 선조 26년 정월 5일】 정월 7일 새벽에 이여송은 군대를 독려하여 유키나가를 평양에서 포위하고 조선의 군대도 역시 그를 따랐다. 유키나가는 소 요시토시,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등의 장수들과 힘을 합쳐 싸워 저녁 무렵에 이르렀지만, 적들보다 힘이 부쳐 한밤중에 결국 병영을 불사르고 퇴각하여, 9일에 백천(白川) 【황해도】 에 이르렀으므로,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을 돕고, 유키나가로 하여금 먼저 가게 하였으며, 자신이 후발대로 싸우면서 개성에 도달하였다.

이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개성에 있었는데 평양의 패전 소식이 경성(京城)에 도달하자, 이시다 미츠나리, 마츠다 나가모리 등은 사자(使者)를 보내 다카카게와 나가마사를 불렀다. 두 장수는 처음에는 패전 소식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후에 오타니 요시츠구가 친히 와서 설명을 하자, 마침내 퇴각하여 경성으로 집결하여, 나가마사는 동대문을 지키고 다카카게는 남대문에 진을 쳤다. 이여송은 이 기세에 편승하여 일거에 경성을 함락시키려고, 26일에 경성에서 고작 5리(里) 거리에 있는 벽제역(碧蹄驛) 남쪽의 여석령(礪石嶺) 아래에 이르렀다. 다카카게는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과 이여송의 군대에 맞서 싸워 그들을 크게 무찔렀으며 거의 이여송을 찔러 죽일 뻔하였다. 이여송은 간신히 몸을 피하였는데, 다음날 동파(東坡)로 후퇴하였으며, 결국 개성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2월에 일본군은 행주성(幸州城) 【경기도】 을 공격하였지만, 수비하는 장수 권율(權慄)은 잘 지켜냈으며, 일본군은 승산이 없자 후퇴하였다.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는 예전에 함경도에 있었는데, 수도에 있던 일본의 여러 장수들이 경성(京城)에 대한 걱정이 많다고 하자, 상의하여 사자를 보내 그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모아 와서 모이도록 하였다. 때마침 길주에서 북도평사 정문부, 유생(儒生) 이붕수(李鵬壽) 등이 군대를 일으키자 수비하는 일본군은 형세가 매우 위급해졌다. 기요마사는 이에 두 왕자 이하 여러 신하들을 나오시게에게 맡겨 함흥에 남겨두고, 자신은 길주로 가서 그들 토병(土兵)들을 격파하여, 일본군을 구하고 다시 함흥으로 출발하였으며, 29일에 마침내 나오시게, 요리후사 등과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일본과 명나라의 양쪽 군대 사이에서는 강화(講和)의 논의가 다시 시작되자, 일본군은 4월 18일부터 점차 경성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이여송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진격하여 개성에 이르렀으며, 이어서 경성으로 들어갔지만 조선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이여송에게 일본군을 추격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은 원래부터 그들을 추격할 의사가 없었다. 때마침 송응창(宋應昌)의 격문을 보고 점차 경성을 출발하였지만 고작 문경에 이르자 돌아갔다.

일본군은 이미 경성을 떠났지만 경상도의 남쪽 해변에 머물면서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울산(蔚山)과 서생포(西生浦)에서부터 동래, 웅천(熊川), 거제(巨濟)에 이르기까지 산에 의지하고 바다에 기대어 18개의 진지를 건설하여,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 히데요시는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군대를 진격하여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일본군의 한 부대는 진주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3월 3일】 히데요시는 우리 군대의 치욕이라고 여겼으며, 또한 진주성의 군대가 강하여 그 존재는 일본군의 연락을 적지 않게 위협하였으므로, 마침내 진주성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여러 부대는 진격하여 진주성을 압박하였고, 【6월 20일】 진주성을 포위한 지 7일이 되자 가토 기요마사는 구로다 나가마사와 계책을 세웠는데, 구갑차(龜甲車)를 만들어 거기에 사졸(士卒)들을 태워 성벽의 돌들을 제거하였으므로, 성벽이 무너져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 판관(判官) 성수경(成守璟),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병사(兵使) 최응회(崔應會) 이하 군민(軍民)들 중 죽은 자가 6만여 명에 이르렀다. 【6월 29일】 히데요시는 이에 명을 내려,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연해(沿海)에 진지를 만들어 병사들을 쉬게 하였지만, 게이죠(慶長) 원년 【조선 선조 29년】 6월에 명나라 사신이 바다를 건너오자 기요마사, 나오시게 등은 앞뒤로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지만, 여전히 일부 장병들은 남아서 더욱 수비를 엄중히 하였다. 【『서정일기(西征日記)』·『한진문서(韓陣文書)』·『고바야카와가 문서(小早川什書)』·『요시카와가 문서(吉川家什書)』·『구로다 나가마사기(黑田長政記)』·『기요마사 고려진각서(淸正高麗陣覺書)』·『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보문집(普聞集)』·『정한위략(征韓偉略)』·『고니시 일행기(小西一行記)』·『요시노 각서(吉野覺書)』·『황명실록(皇明實錄)』·『전절병제고(全浙兵制考)』·『선조실록(宣祖實錄)』·『국조보감(國朝寶鑑)』·『징비록(懲毖錄)』·『한음문고(漢陰文稿)』·『동년보(同年譜)』·『백사집(白沙集)』·『임진일록(壬辰日錄)』·『농포집(農圃集)』】

해군의 경과

분로쿠(文祿) 원년 4월 10일에 일본 해군의 장수인 쿠키 요시타카(九鬼嘉隆),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등은 수군을 이끌고 나고야에 도착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에 요시타카 등으로 하여금 다시 키이(紀伊), 히젠(備前)의 전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도록 하였다. 【4월 19일】 이리하여 일본 해군은 전함을 부산 웅천의 해안에 정렬해 놓고 적의 전함에 대비하였지만, 5월 7일에 토도 타카토라는 조선의 수군 【주장(主將)은 원균(元均)과 이순신(李舜臣)】 과 옥포(玉浦) 【거제도 연안에 있다.】 앞바다에서 싸워 패하고, 이어서 같은 달 29일에 노량(露梁) 【경상남도 곤양(昆陽)의 남쪽에 있다.】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이때 일본 해군의 지휘관 이름은 분명치 않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풀어 돌진하였으므로 일본군은 대적하지 못하고 다시 패배하였다. 거북선은 보통 이순신이 발명하였다고 일컬어지지만 그 이름은 이미 멀리 태종(太宗) 때부터 보인다. 태종 13년 2월에 왕은 친히 임진강에 가서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살펴보았다는 사실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 기재되어 있다. 단지 그 제작 기법이 이순신의 거북선과 같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일본군에서는 그것을 눈먼 배[めくら船]라고 부르며 무서워하였다.

6월 2일에 일본 해군은 이순신 등이 이끄는 수군과 미륵도(彌勒島) 【경상남도 통영의 남쪽】 의 당포(唐浦)에서 싸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의 부장(副將) 이몽구(李夢龜)는 일본의 장선(將船)을 수색하여 금색의 둥글부채 한 자루를 획득하였는데, 그 부채면에는 “귀정유구수전(龜井流求守殿)”이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귀정유구수(龜井流求守)’는 아마도 ‘가메이 고레노리(龜井武藏守玆矩)’일 것이다. 이어서 5일에 당항포(唐項浦) 【『동국여지승람』에는 ‘당항포(當項浦)’라고 씌어 있으며, 고성(固城)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은 다시 패하였다. 이때 쿠키 요시타카, 카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은 경성에 있었는데, 조선 수군이 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남해로 달려갔지만, 7월 7일 【조선력으로는 8일】 에 야스하루는 전함 60여 척을 이끌고 웅천(熊川)을 출발하여 견내량(見乃梁) 【거제도의 서쪽】 에 도착하여 조선의 수군과 마주하였다. 이순신은 속임수로 후퇴하여 그들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해 내고 화포를 쏘아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야스하루는 전함 39척을 잃고 쾌속정을 투입하여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 요시타카와 요시아키는 부산에 있었는데 야스하루가 출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배를 출발시켰으며, 9월에 안골포(安骨浦)에 이르러 이순신 등의 군대와 마주쳤는데 역시 거북선과 화포에 격파되어 후퇴하였다.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해군의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거제에 수채(水砦)를 쌓고, 선책(船柵)을 설치하고 함부로 나가서 싸우지 말도록 하였다.

분로쿠(文祿) 2년 2월에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토 요시아키, 쿠키 요시타카 등은 웅천에 있었는데, 조선의 수군이 여러 차례 항구 안으로 들어와 일본의 수채를 침범하였으므로, 2월 1일에 여러 장수들과 상의하여 몰래 쾌속정을 보내 습격하여 그들의 배 여러 척을 탈취하였다. 【『다카이야마공실록(高山公實錄)』·『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칸세이중수보(寬政重修譜)』·『고려선재기(高麗船戰記)』·『와키자카가기(脇坂家記)』·『정한위략(征韓偉略)』·『선조대왕실록(宣祖大王實錄)』·『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조선의 의병(義兵)

조선의 주(州)와 군(郡)이 바다를 건너온 일본군을 수비하는 데 실패하자, 여러 도(道)에서 강개한 선비들이 일어나 이를 회복하려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현풍(玄風) 【경상북도】 의 유생 곽재우(郭再祐)는 먼저 의령(宜寧)에서 일어났고, 전 제독(提督) 조헌(趙憲)도 역시 옥천(沃川) 【충청북도】 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선조 25년 4월】 장흥(長興) 【전라남도】 의 고경명(高敬命), 광주(光州) 【전라남도】 의 김천일(金千鎰), 합천(陜川) 【경상남도】 의 정인홍(鄭仁弘), 고령(高靈) 【경상북도】 의 김면(金沔), 수원(水原)의 홍언수(洪彦秀) 및 그의 아들 홍계남(洪季男) 등이 이어서 군대를 일으켰지만, 고경명과 조헌은 일본군과 금산(錦山) 【전라북도)】 에서 싸워 패하여 사망하였으며, 【고경명의 전사는 7월이고, 조헌은 8월이다. 】 홍언수도 역시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후에 진주성(晉州城)에 진입하였는데, 이듬해 6월에 이 성이 함락될 무렵에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묘향산(妙香山) 【평안북도】 의 노승(老僧)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호는 청허(淸虛)】 도 역시 신도 수천 명을 모아 병사를 일으켰다. 이때 국왕은 수도를 떠나 의주(義州)에 있었으므로, 곧 그곳으로 가서 왕을 알현하고, 제자인 의엄(義嚴)을 총섭(摠攝)으로 삼아 그 무리들을 이끌고 순안(順安)의 법흥사(法興寺)에 진을 쳤다. 【선조 25년 7월】 이때 그의 뛰어난 제자였던 처영(處英) 【호는 묵뇌(黙雷】 은 전라도에서 일어나 도도절도사(道都節度使)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유정(惟政) 【송운대사(松雲大師), 호는 사명(泗溟)】 은 강원도에서 일어나 평양으로 갔다. 유정은 송운이라고 불렸으며, 금강산에 있었지만 왕의 교서(敎書) 및 휴정의 격문이 도착하자 곧바로 일어나 산속의 승려들을 규합하고, 또한 글을 사방에 보내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9월에 함경북도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도 역시 군대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고, 【9월 16일】 10월에 회령에 들어가 국경인(鞠景仁)을 주살하였다. 【10월 14일】 그 외에 각 도에서 이른바 의병(義兵)을 일으킨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으며 도처의 일본군들에게 항거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으며 절도가 없었고 훈련도 역시 매우 부족하여 오합지졸들이었으므로, 한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자 잇따라 패배하였음은 물론이고, 주둔이 길어지자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는 등, 거의 도둑떼와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있게 되었다. 【『일월록(日月錄)』·『조야첨재(朝野僉載)』·『농포집(農圃集)』·『연려실술기(燃黎室述記)』】

강화(講和)와 그 파기

처음에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등이 평양에서 패하자, 명나라는 비로소 일본군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즉시 먼저 설득하여 화의(和議)함으로써 그들의 군대를 완화시킬 계획을 세우고, 가흥(嘉興) 사람인 심유경(沈惟敬)을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삼아 일본군 쪽에 보내서 일본군을 설득하도록 하였다. 분로쿠(文祿) 원년 【조선 선조 25년】 8월 29일에 심유경은 평양으로 와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만나 우호(友好)의 이로움을 말하였다. 유키나가는 처음부터 강화(講和)의 뜻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조선군과 임진(臨津)에서 서로 마주하자 몰래 편지를 보내 강화를 논의하였으며, 【5월 15일】 이어서 대동강 연안에서 서로 마주하였을 때에도 소 요시토시(宗義智) 씨의 가신(家臣)인 야나가와 노리노부(柳川調信), 승려 현소(玄蘇) 등을 보내 대사헌(大司憲) 이덕형(李德馨)과 강 위에서 강화를 논한 적이 있었다.(6월 3일) 이 때문에 심유경과 만나자 곧 그의 말에 순순히 따라 심유경으로 하여금 다시 돌아가 보고하게 하고, 50일을 한도로 하여 나무 팻말[木標]을 평양의 서북쪽에 세우고 일본인도 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조선인도 역시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11월 14일에 심유경이 또 왔다. 유키나가는 내년 봄에 함께 나고야(名護屋)에 가서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며칠 동안 군영 안에 심유경을 묵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제독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통솔하여 조선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는데, 이여송은 원래부터 화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분로쿠 2년 정월 7일에 이여송은 군대를 진격시켜 평양을 공격하고 마침내 유키나가는 패주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은 벽제(碧蹄)에서 패하자 크게 두려워하여,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상의하여 다시 심유경을 유키나가에게 보내 화의를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심유경은 경성으로 들어가 유키나가의 군영에 이르러 화의를 도모하였으며, 유키나가는 이를 허락하여 자신이 조정하는 데 힘을 썼다. 이때 일본군도 역시 식량이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질병이 유행하여 군대의 사기가 갑자기 저하되었으므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은 곧바로 심유경의 말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자, 히데요시도 역시 식량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화의를 허락할 뜻이 있었다. 이에 우선 경성 및 각지에 주둔하는 일본군에게 명하여 급히 군대를 철수하여 경상도의 남해안으로 퇴각하도록 하였다.

4월 18일에 일본군은 경성을 출발하였다. 이날 명나라의 사신인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 두 사람은 일본 군영에 왔으므로,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두 사신과 함께 나고야에 갔다. 【5월 15일】 히데요시는 그들을 불러 【23일】 잔치를 베풀고 선물을 보내 그들을 후하게 대접는데, 마침내 화약(和約)의 조항을 정하여 그들에게 주었다. 또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명하여 조선의 두 왕자 및 그 수행원들을 보내도록 하였고,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딸려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히데요시가 명나라의 사신들에게 준 화약의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 명나라 임금의 딸을 일본의 후비(后妃)로 삼을 것

 (2) 감합인(勘合印)을 복구할 것

 (3) 양국의 대신들은 각서를 교환할 것

 (4) 조선의 네 도(道)를 돌려줄 것

 (5)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보내 인질로 삼을 것

 (6) 조선의 두 왕자를 돌려보낼 것

 (7) 조선의 대신(大臣)은 영원히 우리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각서를 바칠 것

경성이 수복되자 왕은 10월에 수도로 돌아왔으며, 명나라는 계요총독(薊遼總督) 고양겸(顧養謙)으로 하여금 조선의 사태를 처리하도록 하고, 송응창과 이여송을 소환하였다. 【12월】 이때 왕은 강화를 달가워하지 않아 이듬해 【일본 분로쿠 3년, 조선 선조 27년】 2월에 진주사(陳奏使) 허욱(許頊)을 명나라에 보내 강화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하였으므로, 명나라는 참장(參將) 호택(胡澤)을 파견하여 다시 그것이 이롭다는 것을 일깨워 주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화의의 교섭은 점점 진척되어 게이죠(慶長) 원년 【조선 선조 29년】 4월에 명나라는 도독첨사(都督僉事) 이종성(李宗城), 도지휘(都指揮) 양방형(楊方亨)을 정·부사(正·副使)로 삼아 일본으로 건너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종성은 부산에서 도망쳐 돌아왔으므로 다시 양방형을 정사(正使)로 삼고 심유경을 부사(副使)로 삼았으며, 조선도 역시 돈녕도정(敦寧都正) 황신(黃愼)을 정사로 삼고, 대구부사(大丘府使) 박홍장(朴弘長)을 부사로 삼아 명나라의 사신들을 수행하게 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은 6월 16일에 부산을 출발하였고, 조선의 사신 황신은 윤7월 【조선력으로는 8월】 4일에 출발하였다. 【부사 심유경은 이보다 먼저 이미 배를 타고 일본에 가 있었다.】

8월 【조선력으로는 윤8월】 29일에 명나라 사절과 함께 조선 사절은 후시미(伏見)에 도착하였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두 왕자를 돌려보냈지만, 왕자가 친히 와서 감사를 표시하지 않고 천한 관리를 보낸 것에 화를 내며 조선 사절의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9월 2일 【조선력으로는 3일】 명나라 사절을 오사카(大阪) 성에서 맞이하고, 다음날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지만, 화약의 조항에 서로 차이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국서(國書)에 “그대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사신을 추방하였으며, 마침내 화의를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요시노각서(吉野覺書)』·『대곡기(大曲記)』·『이우소유물어(梨羽紹幽物語)』·『적번벌열록(荻藩閥閱錄)』·『고바야카와가 문서(小早川什書)』·『남선사구기(南禪寺舊記)』·『조선어진실기(朝鮮御陣實記)』·『정한위략(征韓偉略)』·『징비록(懲毖錄)』·『서애집(西涯集)』·『일월록(日月錄)』·『선조실록(宣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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