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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임진란(壬辰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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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壬辰)·정유란(丁酉亂) [분로쿠(文祿)·게이죠(慶長) 역(役)] 의 경과
  • 정유란(丁酉亂) [게이죠(慶長) 후역(後役)] 의 경과

정유란(丁酉亂) [게이죠(慶長) 후역(後役)] 의 경과

정유재란과 부서(部署)

게이죠 원년 9월에 강화의 논의를 파기하자 히데요시는 곧바로 다시 정벌에 나서도록 명령을 내리고, 이듬해 2월 21일에 도선군(渡鮮軍)의 부서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1. 선진(先陣)·2진(二陣)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7명의 장수로 하고, 가토와 고니시는 격일(隔日)로 교대하여 근무한다.

 1. 3진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 8명의 장수.

 1. 4진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重) 【나오시게의 아들】

 1. 5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 6진 쵸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 7명의 장수.

 1. 7진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이코마카 주마사(生駒一正),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 8진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 부산성(釜山城), 【수장(守將)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가덕성(加德城), 【수장 다카하시 나오츠구(高橋直次)】 죽도성(竹島城), 【수장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서생포성(西生浦城) 【수장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

  전체 군대 약 14만 1500명

 1. 토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토 요시아키가 수군(水軍)을 감독하고, 필요에 따라 사국(四國)의 병력이 그를 지원할 것.

 1. 우선 전라도를 평정하고 그로부터 충청, 경기 등으로 나아갈 것.

 1. 만약 명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조선의 수도에 접근하는 데 5, 6일 정도의 거리에 도착하면, 신속히 그것을 보고할 것. 【『아사노가 문서(淺野家文書)』·『정벌기(征伐記)』·『정한위략(征韓偉略)』】

육군(陸軍)의 경과

다시 조선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가토 기요마사는 다른 군(軍)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갔으며, 【게이죠 2년 정월 14일, 조선 선조 30년 정월 15일】 죽도(竹島) 【경상남도】 의 옛 보루를 복구하고 부산의 수병(戌兵)을 합쳐 기장(機張)에 진을 쳤다. 이어서 양산(梁山)을 함락시키고 서생포(西生浦) 부근에 방(榜)을 걸어 백성들에게 타일러 쓸데없이 소요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별도로 부산 밖 바다에서 진격하여 두모포(豆毛浦)로 들어갔으며, 【정월 15일】 2월 초하루에 부산에 있는 원래의 진영을 수리하여 오랫 동안 머물 계획을 세웠지만, 3월 중순에 이르러 제3군 이하의 여러 장수들이 잇따라 바다를 건너오자, 다섯 갈래로 나누어 조선에 들어가 동래, 기장, 울산 등을 점거하고 웅천, 김해, 진주, 사천, 곤양 등의 사이를 왕래하였다. 그렇지만 결코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의 폭행을 하지는 않았으며 힘써 인민의 안심을 도모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조선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를 총독(總督)으로 삼고, 첨도어사(僉都御史) 양호(楊鎬)를 경리(經理)로 삼고, 전 도독동지(都督同知) 마귀(麻貴)를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아, 군대를 출발시켜 조선을 구하러 갔다. 이리하여 양호와 마귀는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넜는데 양호는 평양에 주둔하였고 마귀는 경성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역할을 분담하였다.

7월에 일본군은 지난번 전쟁[임진란]을 거울삼아 육군과 힘을 합쳐, 우선 조선의 수군을 격파하고 한산도(閑山島)를 점령하였다. 이에 앞서 히데요시는 조선에 있는 장수들에게 편지를 보내 공격을 재촉하였으므로 이때 일본군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우키타 히데이에를 대장으로 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 5만여 명은 경상도의 남쪽 해안을 따라 운봉(雲峰) 【전라북도】 을 접수하고 남원(南原)으로 향하였다. 다른 한 부대는 모리 히데모토를 대장으로 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하여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약 5만 명은 경주(慶州)를 출발하여 대구를 거쳐 전주(全州)로 향하였다. 나머지 한 부대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장수 야마구치 마사히로(山口正弘) 등 8천여 명을 이끌고 밀양과 현풍을 거쳐 충청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8월에 우키타 씨의 군대가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하였다. 【12일】 남원에는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요동(遼東)의 군대를 이끌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 등과 지키고 있었지만, 마침내 15일 【조선력으로는 16일】에 성은 함락되어 이복남 등은 전사하고 양원은 간신히 몸을 피하였다. 명나라의 유격(遊擊) 진우충(陳愚衷)은 전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남원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우키타 씨의 군대는 곧바로 전주를 함락시켰고, 【19일, 조선 20일】 모리 히데모토의 군대도 역시 황석산성(黃石山城) 【경상남도】 을 함락시키고, 안음(安陰) 【경상남도, 지금의 안의(安義)】 을 접수하고 와서 만났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진격하여 충청도를 평정하고, 히데모토는 전주에서 공주(公州)를 거쳐 전의(全義) 【충청남도】 에 도착하였으며, 【9월 7일】 다른 부대인 가토 기요마사는 진천(鎭川) 【충청북도】 에, 구로다 나가마사는 직산(稷山) 【충청남도】 에 도달하였다. 이에 앞서, 명나라 군대는 후퇴하여 왕성(王城)을 지켰으며 한강의 험준함에 의거하였는데, 경리 양호는 평양(平壤)에서 와서 부총병 해생(解生)으로 하여금 직산을 지키게 하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와 소사평(素沙坪)에서 싸웠다. 이때 히데요시는 군대를 퇴각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며 또한 날씨도 점차 추워졌으므로, 10월에 일본군은 후퇴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집결하였다. 기요마사는 울산(蔚山)에, 나가마사는 양산(梁山)에, 유키나가는 순천(順川)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泗川)에 주둔하였는데, 시작과 끝이 7, 8십 리가 되는, 모두 16개의 진영이 해안을 따라 꾸려졌다.

12월에 명나라 장수 양호와 마귀는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였고, 조선의 도원수(都元帥) 권율 등은 이들을 따라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포위하였다. 당시 기요마사는 서생포에 있었는데, 변고를 듣고 일어나 쾌속정을 타고 밤에 성 안으로 들어갔다. 도산(島山)은 포위된 지 12일이 되자, 【게이죠(慶長) 2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정월 4일까지】 양식이 부족하여 매우 곤란하였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모리 히데모토 이하 일본군의 여러 장수들은 도산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구원하였으므로, 명나라 군대는 패하였으며 마침내 포위를 풀고 경주로 도주하였다.

7월 【게이죠 3년, 조선 선조 31년】 에, 양호는 파직되고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대신 경리(經理)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명나라 군대는 삼협(三協)의 병력을 네 방면으로 나누어, 마귀(麻貴)는 동로(東路)를 담당하고, 동일원(董一元)은 중로(中路)를 담당하며, 유정(劉綎)은 양로(兩路)를 담당하고, 진린(陳璘)은 수로(水路)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8월에 유정은 순천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먼저 거짓으로 유키나가와 화의를 약속하고, 그를 유인하여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9월 19일에 순천을 포위하고, 진린은 해상(海上)으로부터 와서 힘을 합쳤지만 결국 당해 내지 못하였다. 23일에 마귀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울산을 공격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로(中路)의 장수 동일원은 유격 모국기(茅國器)와 사천을 공격하고, 【9월 7일】 이어서 망진(望津), 영춘(永春), 곤양(昆陽) 등의 진지를 함락시켰지만, 사천읍 이외의 새로운 진지에 이르러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크게 패하여, 【10월 1일】 진주로 돌아갔다. 【『기요마사 고려진각서(淸正高麗陣覺書)』·『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아사노가 문서(淺野家文書)』·『구로다가기(黑田家記)』·『조선물어(朝鮮物語)』·『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정한위략(征韓偉略)』·『명사(明史)』·『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징비록(懲毖錄)』·『사쓰마번구기(薩藩舊記)』】

해군(海軍)의 경과

게이죠(慶長) 2년 2월 21일에 히데요시는 도선군(渡鮮軍)의 역할 분담을 정하자,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에게 명하여 해군을 통솔하게 하고, 사국(四國)의 병력으로 하여금 형편대로 그를 돕도록 하였다. 4월에 야스하루, 요시아키 등이 조선에 진입하자 적의 해군은 그들을 중도에 요격하려 하였지만, 때마침 태풍이 불고 파도가 심해, 조선의 수군은 거제로 물러나자, 야스하루 등은 다행히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은 물러나고 전라수사(全羅水使) 원균(元均)이 그를 대신하였다. 【2월】 원균은 한산도에 도착하여 이순신의 약속을 모두 바꾸고 형벌이 지나쳤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떠나고 군대의 사정은 동요하였다. 7월 15일 원균이 수군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절영도(絶影島) 부근에 도달한 때는 이미 해질 무렵이었는데 군사들은 한산도를 출발하면서부터 하루 종일 노를 저어, 모두 피로에 지쳐 일본 군함이 바다에 출몰하는 것을 보면서도 운항할 수 없었다. 또 풍랑이 갑자기 일어 전함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원균은 남은 함선들을 수습하여 가덕도(加德島)로 후퇴하였다. 그날 밤, 일본 해군의 장수인 토도 타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토 요시아키 등은 진격하여 조선 함선의 정박지를 습격하였다. 조선군은 16일 새벽에 또 일본 군대의 습격을 받아 패배하자,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는 물에 빠져 죽고 원균도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다시 등용되어 통제사(統制使)가 되었고, 9월에 일본 해군과 진도(珍島) 【전라남도】 의 벽파정(碧波亭)에서 싸워 일본 해군을 격파하고, 그들의 전함 30여 척을 파괴하였다. 이듬해 6월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은 남하하여 해군을 통솔하였는데, 8월에 이순신은 일본 해군과 고금도(古今島) 【전라남도의 남해에 있는 완도(莞島)의 동쪽에 있다.】 부근에서 싸워 역시 그들을 격파하고, 적군의 머리 백여 개를 획득하였지만, 진린은 그것의 대부분을 빼앗아 자기의 공으로 돌렸다.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와키사카가기(脇阪家記)』·『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정한위략(征韓偉略)』·『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선조실록(宣祖實錄)』·『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징비록(懲毖錄)』·『조야첨재(朝野僉載)』】

히데요시(秀吉)의 사망과 일본군의 철수

게이죠(慶長) 3년 【조선 선조 31년】 8월 18일에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다. 유명(遺命)에 따라 죽음을 비밀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는 유명을 받들어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치쿠젠(筑前)의 하카다(博多)에 보내 군대를 귀환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고, 토쿠나가 나가마사(德永壽昌), 미야기 토요모리(宮木豊盛) 두 사람을 조선에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을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는 사천에서 대패한 후에는 일본군을 크게 두려워하여, 10월 13일에 모국기(茅國器)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허락을 받아 사신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청고, 그의 동생인 모국과(茅國科)를 보내 인질로 삼게 하였다. 유정(劉綎)도 역시 유키나가(行長)와 화의를 논의하였으며, 유천작(劉天爵)을 인질로 삼게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에 있는 여러 장수들은 서로 약속하고 11월 10일을 군대 철수의 시한으로 삼았는데, 15일 【11월】 에 요시히로는 사천을 떠났으며, 17일에 기요마사는 울산을 떠났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 여러 장수들도 역시 같은 날 군영을 철수하였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히데요시가 이미 세상을 떠나 일본군이 곧 조선을 떠나려는 것을 알자, 곧바로 총병(總兵) 등자룡(鄧子龍) 및 조선 통제사 이순신을 보내 수군 천여 명을 통솔하여 그들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요시히로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므로, 17일에 요시히로는 배를 순천 연안에 정박시켰는데, 18일 새벽에 적의 선박과 노량(露梁) 【경상남도】 에서 싸워 많은 병사들을 잃고, 점차 군대를 철수하여 거제(巨濟)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명나라 총병 등자룡과 함께 여러 차례 일본의 해군을 괴롭힌 조선 통제사 이순신도 역시 유탄에 맞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요시히로는 12월 10일에 하카다에 나타났으며 유키나가도 역시 돌아왔는데, 요시히로는 예전에 사천 대첩에서 명나라 사람들을 항복시켰고, 이 전투에서도 역시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 수군과 격렬히 싸워, 일본 군대가 온전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이에야스는 토시이에(利家)와 상의하여 그 공을 높이 평가하고 보도(寶刀) 및 봉읍(封邑) 4만 석(石)을 요시히로에게 추가로 하사하였다. 【『히데요시보(秀吉譜)』·『기요마사기(淸正記)』·『나베시마 나오시게보(鍋島直茂譜)』·『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사쯔마번구기(薩藩舊記)』·『정한위략(征韓偉略)』·『명사(明史)』·『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징비록(懲毖錄)』·『이충무공전서부록(李忠武公全書附錄)』】

명나라 군대의 철수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은 곧바로 군대를 철수하였으므로,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리고 명나라 군대도 역시 곧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선조 32년 【일본 게이죠(慶長) 4년, 명나라 만력(萬曆) 27년】 정월에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 진린(陳璘), 마귀(麻貴), 동일원(董一元) 등은 모두 군영을 철거하고 경성을 향하였으며, 형개(邢玠)는 네 노선[路]의 병력을 통솔하여 서쪽으로 돌아갔다. 만세덕(萬世德), 이승훈(李承勳), 【都督同知】 두잠(杜潛) 【산동안찰부사(山東按擦副使)】 등은 아직 경성에 남아 뒷수습을 잘 하려고 하였지만 이듬해 9월에 역시 돌아갔다. 이리하여 명나라 군대는 모두 조선에서 철수를 완료하였다.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조야첨재(朝野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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