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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급히 전비(戰備)를 정비하고 철쇄(鐵鎖)를 명양도(鳴洋島) 【전라남도 진도와 우수영(右水營) 사이에 있는 해협】 에 가로질러 일본 전함의 통과를 막았으며, 또한 거북선이라는 일종의 전함을 만들어 일본군을 크게 괴롭혔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 배의 구조는 선상(船上)을 큰 판으로 덮어 그 모양이 마치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고, 판 위에는 十자형의 좁은 통로가 있어 통행할 수 있으며, 나머지 부분에는 모두 끝이 뾰족한 칼을 꽂아 놓아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앞대가리와 후미(後尾) 및 양쪽 가장자리에는 총구(銃口)를 뚫어 놓아, 병사들이 배 안에 숨어서 일제히 사격을 하는 데 편리하였다. 조종이 자유자재이고 속도가 빨라 날아가는 듯하였다고 한다. 분로쿠(文祿) 원년 4월 13일 【조선력으로 14일】 에 육군의 장졸들이 부산에 상륙함에 따라, 일본 해군은 함선을 부산 웅천(熊川)의 해구(海口)에 배열해 놓고 적함에 대비하였는데, 경상도 우수군절도사(右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은 여러 성들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노량(露梁)으로 후퇴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곧 전함 20여 척을 이끌고 와서, 5월 7일에 일본 함대 수십 척을 거제도 【경상남도】 동쪽 해안의 옥포(玉浦)에서 요격하여 그들의 함선 20여 척을 불태웠다. 이때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하여 사기가 완전히 저하되어 있었는데, 승전보가 처음으로 도착하자 상하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이어서 이순신은 같은 달 29일에 일본 함대를 노량 【경상남도 하동군】 에서 발견하여 크게 싸웠다. 수십 척이 합쳐져 싸웠는데 갑자기 날아온 탄환이 그의 어깨를 관통하였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전투를 독려하는 데 크게 힘써,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당포(唐浦), 【경상남도 통영(統營)의 서쪽】 당항포(唐項浦) 등에서 일본 해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경성에 주둔하고 있던 쿠키 요시타카(九鬼嘉隆),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은 조선 해군이 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남해(南海)로 돌아왔으며, 7월 7일 【조선력으로는 8일】 에 야스하루는 이순신과 견내량(見乃梁) 【경상남도 고성군】 에서 싸웠지만 이기지 못하고, 요시타카·요시아키는 전함 39척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구하였으며, 9일에 이순신과 안골포(安骨浦)에서 싸웠는데 역시 패하여 물러났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근거지를 한산도(閑山島) 【경상남도 통영군】 에 두고 근해를 순찰하며 경계하였으며 또한 한 부대를 장문(長門)에 파견하여 일본 해군을 견제할 것을 꾀하였다. 공훈에 따라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으며 이어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다. 원균은 이순신의 명성이 나날이 더해가고 또한 직위도 자기보다 높아지는 것을 보고 못마땅히 여겨 몰래 사람을 보내 모함하였으므로, 이순신은 강등되고 원균이 대신 통제사가 되었다. 그런데 정유년(丁酉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원균은 일본 해군과 싸워 대패하고, 마침내 서천도(黍川島) 【경상남도 거제도에 딸린 섬】 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논의하여 다시 이순신을 기용하기로 하였다. 게이죠 2년 9월 16일에 이순신은 일본 해군 3백여 척을 진도 【전라남도】 의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요격하여 그 전함 30여 척을 파괴하였다. 이듬해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세상을 떠났는데 유명(遺命)으로 조선에 있는 장병들을 소환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은 이 사실을 정탐하여 알아내고 이순신 및 부장(部將) 등자룡(鄧子龍)으로 하여금 일본군의 귀로(歸路)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노량 【경상남도】 에서 일본 해군과 전투를 벌여 승패를 주고받았다. 이순신은 자신이 북을 치며 부하들을 지휘하였지만 갑자기 날아온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여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때가 바로 선조 31년 11월 19일 【게이죠 3년, 만력(萬曆) 26년】 이다. 이순신은 천성이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또한 평소에 해저(海底)의 깊이와 조류(潮流)의 속도 등을 숙지하여 일본 함대과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는 많은 공을 세울 수 없었다. 후에 영의정을 추증(追贈)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하였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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