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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碧蹄館) 전투

1월 26일 【조선력으로는 27일】 에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먼저 여석령(礪石嶺)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벽제면 벽제관(碧蹄館)의 남쪽】 에서 명나라 군대와 충돌하여 승패를 주고받았다. 같은 날 오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등 여러 장수들이 와서 구원하였으며, 타카카게는 자신이 한 부대를 이끌고 여석령 아래에 진을 쳤으며, 무네시게, 모리 모토야스(毛利元康),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등을 고개 위에 진을 치도록 하였다. 별도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은 예비 부대로서 고개 뒤에 있었는데, 이여송은 진격하여 타카카게의 진지를 압박해 왔다. 전투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고개 위에 있던 군대가 갑자기 아래 있는 명나라 군대의 중심을 공격하였다. 예비 부대도 역시 기회를 보아 돌진하여 우리 군대는 세 방면에서 적병을 포위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여송은 허둥대다가 말에서 떨어져 타카카게의 부장(部將)인 이노우에 고로(井上五郞) 병위(兵衛)에게 자상을 입었지만, 아군의 구호를 받아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으며, 명나라 군대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사상자가 모두 만여 명에 달한 이 전투를 벽제관 전투라고 이른다. 이여송은 파주(坡州) 【경기도】 로 달아나 패잔병들을 수습하였는데 사기가 저하되어 다시 싸울 의지가 없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의 북쪽에서 군대를 돌려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때문에 이여송은 평양으로 퇴각하여 대동강을 차지하고 방어하였다. 4월 18일부터 일본군은 경성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부산으로 향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이여송은 20일에 경성으로 들어왔다. 조선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등은 명나라 군대를 설득하여 대대적으로 일본군을 추격하기로 하였다. 이여송은 우리 군대가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에 명나라 조정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등의 말을 받아들여 병력의 철수를 감행하고 단지 유정(劉綎)만을 남겨 두어 뒷일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여송 등은 이해 12월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으며 공을 세움에 따라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었고 세록(歲祿) 백 석이 증가되었다. 만력(萬曆) 26년 4월에 토만(土蠻)이 요동(遼東)을 침범하였다. 이여송은 명을 받고 적군의 토벌에 나섰지만, 경기병(輕騎兵)들을 거느리고 적진에 깊이 들어갔다가 매복에 걸려 분전하다 사망하였다. 신종(神宗)은 매우 슬퍼하여 소보영원백(少保寧遠伯)을 추증하였으며, 또한 사당을 짓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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