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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유경(沈惟敬)

심유경(沈惟敬)은 중국 가흥(嘉興) 【절강성(浙江省) 가흥부(嘉興府】 사람이다. 밤이나 낮이나 주막에서 지내는 무뢰한이었는데, 방랑하다가 수도인 북경(北京)으로 와서 오현(吳縣)의 기생인 진담여(陳澹如)과 결혼을 하였다. 진담여의 하인인 정사(鄭四)라는 사람은 일찍이 해구(海寇)에게 체포되어 일본을 갔다 온 적이 있어서 상당히 우리나라 사정에 밝았다. 심유경은 항상 정사의 이야기를 들어 대략적으로 일본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이때 분로쿠(文祿)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조선이 패하였다는 소식이 연달아 북경에 전달되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설객(說客)을 풀어 우리 군대의 진격을 지연시키려고 꾀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심유경을 추천하였으므로 석성은 심유경을 불렀다. 심유경은 교묘하게 석성을 설득하여 조선으로 가서, 우리 장병들과 상의하여 화의(和議)를 체결하는 중임을 위임받았다. 심유경은 북경을 떠날 때 천금(千金)을 들여 망의(蟒衣), 옥대(玉帶), 화폐(貨幣) 등을 구입하여, 우리 군대에게 줄 뇌물로 삼았다. 분로쿠 원년 【명나라 만력 20년】 9월에, 심유경은 의주를 거쳐 순안(順安) 【평안남도】 에 도착하여, 먼저 평양에 웅거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사서(使書)를 보내고, 진귀한 보물과 화폐를 주면서 만나 줄 것을 요구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를 승낙하였다. 심유경은 이에 유키나가의 진영에 와서 백방으로 화의(和議)의 이로움을 설득하였으며, 유키나가는 군대가 원정을 온 지 오래되어 점차 권태를 느낄 때가 되었으므로, 심유경의 말을 받아들여 화의 7조항 【이 조약은 비밀에 부쳐졌으므로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후에 체결된 나고야조약(名護屋條約)과 대동소이하지 않겠는가.】 을 요청하였다. 심유경은 회답하기를 “사안이 중대하여 일단 나라에 돌아가 품신하여 재가를 받겠다. 왕복하는 기간으로 50일이 필요하다. 때문에 휴전을 요구한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의 서북쪽 곡산원(谷山院)에 팻말을 세워 양쪽 군대의 경계로 삼고, 각자 이곳을 넘지 않기로 하였다.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에 명나라 조정에서의 논의는 일변하여 주전론(主戰論)이 승리를 거두고,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 제독(提督) 이여송 등은 속속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내려왔다. 이여송은 유키나가를 평양에서 격파하고 이어서 개성을 수복하였으며 파죽지세로 경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지만, 벽제관에서 대패하자 사기가 갑자기 꺾였다. 심유경은 이 기회에 편승하여 다시 화의를 제창하면서 교묘한 말로 명나라의 상하 관료들을 속였으며, 또한 외국 원정에 피로를 느끼고 있는 우리 장병들을 권유하며 설득하였으므로, 담판은 쉽게 진척되었다. 유키나가 등은 사자(使者)를 나고야 【히젠(肥前)에 있을 당시 히데요시가 이곳에 거처하였다.】 에 보내 상세한 내용을 보고하였으며, 또한 명나라 사신을 접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허락하고 경성에 있는 일본군에게 명령을 내려 조선의 남쪽으로 후퇴하도록 하였다. 분로쿠(文祿) 2년 5월 23일에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 사용재(謝用梓), 서일관(徐一貫) 등을 불러 7개 조항의 약관(約款)을 제시하고, 명나라가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면, 곧바로 조선에서 아군을 철수하고 영구히 우호를 보장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이리하여 화의가 성립되려는 희망이 생겼으므로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일부 남아서 지키는 군대 외에는 모두 병력을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도록 하였다. 또한 예전에 가토 기요마사가 잡아온 두 왕자 및 대신들 이하를 모두 돌려보내고,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고니시 히다노카미조안(小西飛驒守如安)을 사절로 명나라에 파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화의는 처음부터 심유경이 양국의 중간에서 몰래 간계를 부린 것으로, 히데요시가 명나라 사절에게 교부한 강화 조건 같은 것도 자세히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단지 히데요시가 바라는 것은 작위[封]와 공물[貢]에 있을 뿐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렇게 심유경이 대충 보고를 마무리함에 따라 일단 화의는 성립될 것 같았지만 만약 실정이 폭로되면 파기될 것은 명백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후 3년이 지나 명나라 사신 양방향(楊方享)과 심유경이 오자, 게이죠 원년 9월 2일에 히데요시는 그들을 오사카(大阪)로 불러 만났지만 화의는 결국 성립되지 않았다. 때문에 심유경은 양방향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거짓으로 보고하기를, 히데요시는 작위를 받고 은혜에 감사하였으며 또한 위조한 표문(表文)을 바치고, 우리나라에서 구입한 진기한 보물들을 명나라 조정에 바치면서 히데요시가 준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다시 원정군을 조선에 상륙시키자 그들의 죄상은 곧바로 폭로되었지만, 심유경은 도리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이것은 일본이 조선의 무례함을 응징하는 군대로서, 명나라에 대해 아무런 다른 뜻이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양방향은 사태가 잘못된 것을 알고 사실을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여 심유경도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석성(石星)의 비호로 간신히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심유경은 다시 조선으로 들어가 오로지 미봉(彌縫)으로 죄를 면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궁색한 나머지 도망쳐 일본군에게 투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령(宜寧)에 이르러 명나라 총독(總督) 형개(邢玠)의 부장(部將)인 양원(楊元)에게 붙잡혔으며 이어서 기시(棄市)되었다. 이때가 만력(萬曆) 25년 【우리[일본]의 게이죠 3년】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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