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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金) [청(淸)] 나라의 조상과 그 흥기(興起)

금(金) [청(淸)] 나라의 조상과 그 흥기(興起)

전설에 따르면 금나라의 선조에 대한 상서로운 조짐이 장백산(長白山) 【함경도와 만주의 경계에 있다.】 에서 일어났다. 하루는 산 위의 호수에 천녀(天女)가 와서 목욕을 하는데, 까치가 가져다준 붉은 과일을 품고서 첫째 아들을 낳았다. 그가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이다. 그는 후에 여러 지역을 옮겨 몽고티무르(猛可帖木兒)에 이르렀으며, 조선 왕 태종 【제3대】 때 와무허(幹木河) 【함경북도 회령 땅으로, 명나라에서는 건주좌위(建州左衛)라고 불렀다.】 땅에서 살았지만, 세종 【제4대】 15년에 우디거(兀狄哈) 야인 【흑룡강 부근의 여진족】 의 습격으로 죽자, 자손들은 난을 피해 오늘날의 만주 성경성(盛京省) 회인현(懷仁縣) 지방으로 옮겨갔다. 그 후에 다시 여러 대를 거쳐, 큐차우(叫場) 【경조(景祖)】 라는 사람이 당시 요동에서 위세를 떨치던 호족인 왕고(王杲)의 부장(部將)이 되어, 호도아라성(黑圖阿拉城) 【만주 성경성 흥경(興京) 부근】 에 거주하였다. 큐차우는 도륜성주(圖倫城主) 【만주 소자하(蘇子河)의 부락】 와 불화가 생겨, 그의 아들 타시(塔失) 【현조(顯祖)】 와 함께 싸워 죽었다. 금(金) 【나중의 청나라】 의 태조 누루하치(奴兒哈赤)는 곧 타시의 아들이다. 그는 28세 때 할아버지 및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으므로, 그 이름은 단번에 알려져 원근의 여러 부락들은 솔선하여 그의 깃발 아래 항복해 왔다. 처음에 명나라는 누루하치에게 건주도독첨사(建州都督僉事)의 직책을 수여하고 그를 잘 대우하였지만, 그 후 그는 점차 강대해지자 조선 폐왕 광해군 【제15대】 8년에 자립하여 나라를 세워 즉위하고, 천명(天命)이라고 연호를 정하고 국호를 금(金)이라고 하였다. 【송나라 시대의 금(金)과 구별하기 위해 후금(後金)이라고도 한다.】

이리하여 명나라는 금나라를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에 임명하여 오로지 전쟁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두송(杜松), 유정(劉綎), 이여백(李如栢) 등은 그를 보좌하였다. 이들 여러 장수들의 대부분은 예전에 임진란 때 조선에서 우리 일본군과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명나라는 또한 병사들을 징발하여 이 전쟁을 돕도록 하였다. 만력(萬曆) 47년 【금나라 천명(天命) 4년, 조선 광해군 11년】 2월에 명나라 군대는 금나라의 도성인 흥경(興京) 【당시 호도아라성에서 흥경으로 천도하였다.】 을 포위하여 공격하려고, 무순(撫順), 개원(開原), 청하(淸河), 회인(懷仁)의 네 경로로 일제히 병력을 진격시켰다. 조선은 명나라의 명에 따라 약 1만 3천 명의 원군을 보냈다. 참판(參判) 강홍립(姜弘立)을 원수(元帥)로 하고 평안병사(平安兵使) 김경서(金景瑞)는 부원수였다. 강홍립 등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장수 유정의 군대와 합류하여 회인 방면으로 향하였다. 네 경로의 병사들을 합쳐 8만 명이 넘었다. 금나라의 태조는 무순 방면에 명나라 군대의 주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정예 병력 6만 명을 이끌고 3월 1일에 사르후(薩爾滸) 【무순의 동쪽】 로 진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명나라 장수 두송 이하 많은 병력을 죽였다. 이튿날인 2일에 태조는 또 개원으로부터 진격하여, 명나라 장수 마림(馬林)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날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은 심하(深河) 【흥경의 동남쪽】 에서 금나라 병사 수백 명과 싸워 승리하고, 곧바로 흥경을 압박하려고 하였다. 아직 명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금나라 군대와 부차(富車) 【흥경의 동쪽 6리 지점에 있으며, 다른 말로는 부찰(富察)이라고 한다.】 의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금나라의 병력은 승세를 타고 서쪽으로부터 속속 와서 연합군의 뒤쪽으로 우회하였으므로, 조선군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는 무리를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게 항복하고, 선천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와 운산군수(雲山郡守) 이계종(李繼宗) 등은 분전하다 사망하였다. 이 전쟁에서 명나라 군대는 약 절반의 병력을 잃었지만, 태조의 병사들은 사상자가 고작 2천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쟁은 실로 태조의 아들 태종이 조선을 침공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금나라 조정이 크게 융성하는 한 시기의 획을 긋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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