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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주(廢主) 광해군(光海君)

광해군은 이름이 혼(琿)이고,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이다. 장자(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은 사납고 패악하여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는데 41년에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이어서 즉위하였다. 개략적인 계보는 아래와 같다.

선조(宣祖) — 1남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가 낳았다. 선조 39년에 태어났으나 일찍 죽었다.】

      【이하는 모두 서자이다.】

      1남 임해군(臨海君) 진(珒)

      2남 광해군(光海君) 혼(琿)

      3남 의안군(義安君) 성(珹)

      4남 신성군(信城君) 후(珝)

      5남 정원군(定遠君) 부(琈) 【추숭하여 원종(元宗)이라 함.】 — 인조(仁祖) 【휘는 종(倧), 처음에는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6남 순화군(順和君) 보()

  【선조의 왕자와 왕녀들은 이 밖에도 많이 있었지만 생략한다.】

명나라는 광해군이 그의 형 임해군을 두고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하여 쉽게 책봉(冊封)을 허락하지 않았다. 요동도사(遼東都司)를 파견하여 진(珒)이 병이 나지는 않았는지를 조사하여 밝히려 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갑자기 낭패스러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덕형(李德馨)과 호조판서(戶曹判書) 황신(黃愼)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상주하게 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왕에 봉한다는 조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해에 임해군 진은 모반을 기도한 것에 연루되어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는데, 대사헌(大司憲) 정인홍(鄭仁弘), 대제학(大提學) 이이첨(李爾瞻) 등 【북인】 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청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등 【남인】 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은 정인홍 등의 건의를 듣고 마침내 임해군을 죽였다. 광해군 5년에 박응서(朴應犀)라는 사람이 변고가 있음을 아뢰기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인목왕후의 아버지】 이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으려고 꾀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의(㼁)는 선조 만년(晩年)에 인목왕후가 낳았으며, 선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8세였다. 왕은 이에 김제남을 체포하여 주살하고, 의를 강화도로 추방하였으며 이어서 죽였다. 그런데 대비(大妃) 【인목왕후】 도 역시 이 역모에 부응하였기 때문에 몰래 왕을 저주하였다는 소문을 내서, 왕은 대비를 폐위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좌의정 정인홍, 예조판서 이이첨 등 【북인】 은 그것을 종용하였지만,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영부사(領府事) 이항복 등 【남인】 은 그것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폐모(廢母)의 잘못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이리하여 폐모의 가부(可否)에 대한 논의가 떠들썩하게 일어났다. 왕은 종실 및 문무백관들을 모아놓고 폐모에 대해 논의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기자헌, 이항복 등 【남인】 을 귀양 보내고, 10년 2월에 대비라는 존호(尊號)를 폐지하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당시 붕당(朋黨)은 북인이 가장 강하였으며 서인과 남인은 약간 숨을 죽이고 있는 상태였다. 북인도 역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의 두 파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여 조정은 나날이 혼란하였다. 그러나 왕은 밤낮없이 주색에 빠져 이를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선비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으며, 또한 풍수설(風水說)을 믿어 쓸데없이 토목을 벌였다. 이리하여 나라의 씀씀이는 궁핍해지고, 공공연히 뇌물이 오가고 은(銀)의 많고 적음으로 관직의 수여를 결정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앞서 서인들은 세력을 잃고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이때가 되어 일어났다. 광해군 15년에 평산부사(平山府使) 이귀(李貴)는 그의 당파인 신경신(申景愼),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등 【서인】 과 모의하여, 삼청(三淸) 사람인 김류(金瑬) 【서인】 를 대장으로 삼아 급히 군대를 일으켜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깜짝 놀라 달아났으며, 조정의 관리들과 위사(衛士)들은 모두 도망쳤으므로, 이귀 등은 곧 왕을 압박하여 옥새를 대비에게 바치게 하고, 마침내 대비의 명으로 왕을 폐위하였으며,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 부(琈) 【추숭하여 원종(元宗)이라 함.】 의 아들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으로 세웠다. 그가 인조(仁祖)이다. 광해군은 추방되어 강화도에 있었는데 후에 교동(喬桐)에 갇혔으며,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가 인조 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조야첨재(朝野僉載)』·『상촌집(象村集)』·『일월록(日月錄)』·『백사집(白沙集)』·『하담록(荷潭錄)』·『연려실기(燃藜室記)』·『고사촬요(考事撮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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