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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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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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문룡(毛文龍)

모문룡(毛文龍)

모문룡(毛文龍)은 호(號)가 진남(振南)이며, 중국 산동(山東) 사람으로 절강성(浙江省)의 전당(錢塘) 천교(薦橋)에 살았다. 비록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매우 영특하여, 명나라 만력(萬曆) 33년【조선 선조 38년】 에 뜻을 세우고 제도(帝都) 【북경】 로 들어가 등용되어 요동도사(遼東都司)가 되었으며, 요양(遼陽)에 머물면서 조선과 소통하였는데, 명나라 천계(天啓) 원년 【조선 광해군 13년】 2월에 요양이 금나라에게 함락되자, 모문룡은 의주로 빠져나와 있다가 7월에 병력 3백여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가, 밤에 진강성(鎭江城) 【지금의 구련성(九連城)】 을 습격하여 그 장수를 살해하였다. 천계 2년에 군진(軍鎭)을 가도(椵島)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의 남쪽 바다에 있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피도(皮島)라고 불렀다.】 에 설치하고 동강진(東江鎭)이라고 불렀으며, 분진(分鎭)을 철산(鐵山), 사량(蛇梁), 신미도(身彌島) 【혹은 운종도(雲從島)라고도 부른다. 가도의 동쪽에 있다.】 등에 설치하였다. 섬 안에 있는 병력은 본래 중국 하동(河東)의 백성들이었는데 천계 원년 무렵부터 많이 도망쳐서 이 섬으로 왔는데, 모문룡은 그 백성들을 병사로 사용하였다. 명나라 조정은 모문룡에게 총병도독(總兵都督)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며, 또한 상방(尙方)은 쇠(釗)와 새서(璽書)를 하사하였다. 천계 4년 【조선 인조 원년】 5월에 모문룡은 장수를 파견하여 압록강을 따라 장백산(長白山)을 넘어 금나라의 동편을 침입하고, 이어서 6년 5월에 또 병사들을 파견하여 안산역(鞍山驛) 【남만주에 있다.】 을 습격하였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금나라는 모문룡에게 견제당해 훗날의 우환을 끊지 못하고서는 힘을 명나라에 전념할 수 없었으므로, 이듬해 【조선 인조 5년 정묘년】 정월에 병력을 일으켜 조선을 정벌하였는데, 정예 병력을 나누어 별장(別將)에게 명하여 밤에 가도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모문룡은 패하자 몸을 피해 미도(彌島)로 들어갔지만, 이해 2월에 금나라는 조선과 강화(江華)의 맹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철수하였으므로, 모문룡의 병력은 다시 나와 부근의 여러 주(州)에 침입하여 벽동(碧潼), 광평(廣坪) 【평안북도】 등의 성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어린아이와 여자들 및 재물을 약탈하였다. 모문룡은 또한 죽음을 각오한 선비 3천여 명을 모집하여 모두 자기의 성(姓)을 쓰도록 하였으며, 바다 위를 휘젓고 다니면서 관문 밖에 위력을 떨쳤다. 그러나 과장된 보고를 명나라 조정에 보내 과대한 군자금을 요구하고 또한 조선을 위협하여 재물을 강탈하는 것도 적지 않았으므로, 요동경략(遼東經略) 원숭환(袁崇煥)은 그가 발호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를 제거하기로 하였다. 숭정(崇禎) 2년 【조선 인조 7년】 6월에 원숭환은 모문룡을 속여 여순(旅順)의 쌍도(雙島)로 유인하고, 그의 12가지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여 그를 참살하였다. 이때 당시 명나라 조정은 전혀 힘이 없어 오로지 원숭환에게 의지하였으므로 그에게 전권을 허락하고 죄를 조사할 수 없었다. 【『명사(明史)』·『명계북략(明季北略)』·『일월록(日月錄)』·『강한집(江漢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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