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7. 병자(丙子)의 난
  • 비고(備考)
  • 청나라와의 관계

청나라와의 관계

조선은 이미 청나라에 복속되어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들었다. 이에 인조 17년에 청나라의 명령에 따라 청나라 황제의 공덕비(功德碑)를 삼전도의 남쪽인 수항단이 있던 곳에 세웠다. 【이 비석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또 항상 청나라에 대해 사대(事大)의 예를 다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무렵 조선에서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은 1년에 4회였으며, 동지(冬至), 정삭(正朔), 성절(聖節), 세폐(歲幣) 【명나라 때는 천추사(千秋使)였지만, 숭덕(崇德) 이후에 세폐사로 하였다.】 가 곧 그것인데, 어느 경우든 표전(表箋)과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세폐로, 그 액수는 실로 막대하였다. 【그 밖에 사은(謝恩), 주청(奏請), 진위(陳慰), 진향(進香), 고부(告訃) 등의 사절은 사안에 따라 파견하였다.】 인조 23년 【청나라 순치(順治) 2년】 에 이르러 삼절(三節) 및 세폐를 합쳐 일행(一行)으로 삼았으며, 그것을 동지사(冬至使)라고 일컬어 1년에 한 번 파견하기로 하였으며, 세폐의 액수도 역시 점차 줄여 나갔다. 조선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바치는 편지에는 조선을 신하라고 일컫는 것은 물론이고, 국왕이 세상을 떠나고 새 임금이 뒤를 이어 즉위할 때에는 청나라로부터 반드시 증시(贈諡)와 책봉(冊封)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제1과 비고 13 「이조의 시법(諡法)과 명(明)·청(淸)의 시호 수여」 참조】

이리하여 조선은 청나라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복종의 예(禮)를 다하였지만, 안으로는 결코 그들에게 흔쾌히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조 21년 【청나라 숭덕 8년】 8월에 청나라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였으며, 23년 【청나라 순치 2년】 3월에 세자 왕()과 봉림대군(鳳林大君) 호(淏)를 풀어주어 돌려보냈다. 왕() 【소현세자(昭顯世子)】 은 머지않아 죽고 아우인 호(淏)가 세자가 되었으며, 27년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를 효종(孝宗) 【제17대】 이라고 한다. 효종은 심양(瀋陽) 【봉천(奉天)】 에 8년 동안 인질로 가 있었으므로 그 굴욕에 분개하여 치욕을 갚으려는 마음이 있었다. 효종은 즉위하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명사들을 등용하여 군정(軍政)을 크게 진흥시켜, 해자(垓字)를 파고 기계를 정비하여 몰래 계획하는 바가 있었지만, 청나라와의 국력의 차이가 너무 커서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으며, 결국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종(顯宗) 【제18대】 이 즉위하고 그 14년 7월에 오삼계(吳三桂) 【명나라의 항신(降臣)】 가 청나라에 반대하여 운남(雲南)에서 난을 일으키자, 조선에서는 사인(士人) 나수좌(羅須佐)라는 사람이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고 오삼계와 힘을 합쳐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년(丙子年)의 치욕을 설욕하도록 청원하였지만 실행되지 못하였다. 숙종(肅宗) 【제19대】 이 즉위한 초기에도 승지(承旨) 윤호(尹鎬)가 북벌(北伐)을 하자는 주장을 하였으나 역시 실행되지 못하였다. 또 숙종 31년에는 대보단(大報壇)을 금원(禁苑) 안에 지어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 지냈고, 영조(英祖) 【제21대】 때에는 명나라의 태조 및 의종(毅宗) 【명나라 최후의 황제】 을 그에 곁들여서 제사지냈으며, 정조(正祖) 【제22대】 는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하여 명나라를 숭배하는 뜻을 밝혔다.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는 청나라에 복종하였지만 속으로는 청나라를 심하게 배격하였으므로, 표면적이고 공식적인 일에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국내의 사사로운 일은 오로지 명나라의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의 연호】 을 사용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조야집요(朝野輯要)』·『국조보감(國朝寶鑑)』·『병자록(丙子錄)』】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