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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송시열(宋時烈)은 자(字)가 영보(英甫)이며, 호는 우암(尤庵)이다. 충청도 은진(恩津) 사람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기 전날 밤에 아버지인 송갑조(宋甲祚)는 공자가 그의 집에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이(李珥)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 【호는 사계(沙溪)】 에게 배워, 마침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인조 11년에 갑과(甲科)에 등제(登第)하였으며, 1등을 차지하였다. 인조 14년에 청(淸) 【만주】 과의 화의가 파기되고, 청의 침입을 당하자, 살던 곳의 방어에 실패하여 패주하였다. 송시열은 왕을 따라 남한산(南漢山)으로 난을 피해 성문(城門)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킨 지 약 2개월 만에 강화(講和)가 성립된 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 호(淏)가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효종(孝宗) 【제17대】 이다. 왕은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패기가 넘쳤으며, 특히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 【봉천】 에 있던 8년 동안 온갖 고초를 맛보았으므로, 즉위한 후에 몰래 청나라에 보복하려고 어질고 뛰어난 선비들을 폭넓게 찾았다. 이에 송시열도 역시 효종에게 불려가 장령(掌令)에 임명된 뒤, 김상헌, 송준길, 김집 등과 함께 우선 내치(內治)를 정비한 다음, 기회를 보아 북벌을 단행하려고 하였다. 때마침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은 송준길 등에게 쫓겨난 것에 원한을 품고, 사신을 청나라에 보내 왕의 비밀 계획과 송시열이 장릉(長陵) 【인조의 비(妃)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 의 비문(碑文)에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사실을 몰래 알렸다. 이리하여 청나라의 위압적인 협박이 날로 급박해졌으므로 송시열 등은 서로 솔선하여 직위에서 물러났다. 그 뒤로 여러 해가 지나 다시 관직에 불려나갔으며 특별히 이조판서를 제수하였다. 송시열은 왕의 특별한 대우에 보은하려고 온 마음을 기울여 보좌하였지만, 왕은 재위한 지 고작 10년 만인 41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현종(顯宗) 【제18대】 이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그가 여러 해 동안 계책을 세워 온 북벌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예론(禮論)에 관한 격렬한 당쟁(黨爭)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형인 소현세자(昭顯世子) 【이름은 왕()】 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런데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죽은 아버지의 부인인 자의대비(慈懿大妃)는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송시열 등은 대비의 상기(喪期)를 1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인(南人)인 윤휴(尹鑴)는 평소에 서인(西人)인 송시열 일파가 조정에 있어서 중용되지 못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으므로, 몰래 보복의 기회를 노려 다른 주장을 하였다. 윤휴는 말하기를, “돌아가신 대왕(大王)은 비록 둘째 아들이었지만 첫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의미는 첫째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비는 3년의 상(喪)에 상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두 파벌의 논쟁은 더욱 치열해졌는데 새 임금인 현종은 결국 1년의 주장을 따랐다. 이리하여 남인의 주장은 패배하고 서인이 승리를 거두자 송시열은 승진하여 좌의정이 되었다. 남인은 한 번 패배하였다고 굴복하지 않고 다시 때를 기다렸다. 현종 15년에 인선대비(仁宣大妃) 【효종의 비 장씨(張氏)】 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시 한 번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할 상기(喪期)에 관해 서인과 남인 두 파는 똑같은 논쟁을 반복하였다. 예조(禮曹)는 처음에 1년이 지당하다고 인정하였지만 갑자기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그것을 9개월로 고쳤다. 남인들은 유생(儒生)들과 서로 어우러져 9개월의 주장을 비방하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이에 1년의 주장을 따랐다. 송시열은 어쩔 수 없이 수원(水原)으로 물러나 처벌을 기다렸다. 남인인 허목(許穆)이 들어와 조정을 차지하고 점차 자신의 당파를 지원하고 서인을 배척하였다.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그 뒤를 잇자, 왕은 당시 밖에 있던 송시열에게 명하여 현종의 지문(誌文)을 편찬하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남인 일파는 이것을 알고는 그것은 불가하다고 극력 주장하고 조정에서는 송시열에 대한 인신공격이 더욱 심해졌으므로, 송시열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장기(長鬐) 【경상북도】 로 유배되었다. 이때는 숙종 원년으로, 송시열의 나이 69세 때이다. 【제5과 비고 4 「붕당(朋黨)」 참조】

이리하여 남인은 서인을 몰아내고 홀로 여러 해 동안 조정의 권력을 농단하였다. 남인들은 경신(庚申)의 대출척(大黜陟) 【숙종 6년】 을 맞이하여 실각하였으며, 서인들은 잃어버린 세력을 다시 만회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보다 앞서, 송시열은 장기에서 거제로 옮겨갔으며, 이때 소환되어 조정에 들어가 그 명성이 한 시대를 기울게 하였는데, 나라 안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일컬어 대로(大老)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찍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노닐던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등은 사정이 있어 송시열을 원망하며 빈번하게 공격의 화살을 쏘았으므로, 서인들은 송시열을 존숭하는 노론(老論)과 박세채, 윤증 등을 받드는 소론(少論)의 두 파로 분열되었다.

서인들이 당 안에 당을 세워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남인들은 뜻밖에 당한 재난을 멈추려고 더욱 그들을 선동하였으므로, 송시열은 다시 관작(官爵)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후에 정읍(井邑) 【전라남도】 에서 사약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고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식(配食)되고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로 『주자대전답의(朱子大全剳疑)』, 『이정전서분류(二程全書分類)』, 『문의통고(問義通考)』, 『심경석의(心經釋疑)』 및 문집 백여 권이 있다. 송시열은 생전에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숭상하는 뜻을 충실히 하였는데,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는 돌아가신 스승의 부탁을 받고 몰래 화양사(華陽祠)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를 세우고,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사종(思宗)의 두 황제를 제사 지냈다. 후에 이를 만동묘(萬東廟)라고 고치고 국가 제사의 반열에 편입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해, 청나라 건륭(乾隆) 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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