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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洪景來)의 난

순조 11년 12월에 관서(關西)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있었다. 그는 무리들을 모아 정주성(定州城) 【평안북도】 을 근거로 삼아, 병력을 나누어 네 방면으로 침략하였다. 청주(淸州) 이북의 읍성(邑城)들은 모두 그에게 호응하였으며 세력이 창궐하여 쉽게 진압할 수 없었다. 이듬해 4월에 이르러 겨우 평정할 수 있었다. 이때 부수찬(副修撰) 박효성(朴孝成)은 상소를 올려 이 난의 원인을 논하였는데, “조선은 당파를 나누어 사욕(私慾)을 챙기며,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자신을 생각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수재(守宰)들은 백성들을 염려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전가(詮家)는 아직도 결코 사람을 골라 뽑지 않고 있고, 창름(倉廩)은 비어 있어 구휼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기계는 무뎌서 공격과 방어에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당시 국가의 실력이 소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로서 즉위한 즉시 아버지인 호(昊) 【순조의 세자였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를 추존하여 익종(翼宗) 【광무 3년에 다시 추존하여 문조(文祖)라고 불렀다.】 으로 삼고, 어머니인 조씨(趙氏)를 왕대비(王大妃)라고 하였다. 헌종은 나이가 어려 순조의 비(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하였으며 6년이 되어 이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의 어머니는 영돈녕(領敦寧) 조만영(趙萬永)의 딸로서, 조만영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은 헌종 5년에 들어서자 우의정이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영의정에 임명되자, 정권은 모두 조씨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왕은 재위 15년에 세상을 떠났다. 헌종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선의 관례에 따라 당시 이씨 왕가(王家)의 가장 높은 혈족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전계군(全溪君) 광(㼅) 【영조의 손자인 은언군(恩彦君) 인(䄄)의 아들】 의 셋째 아들 변(昪)을 강화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전계군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지만 변은 이때 갑자기 왕통을 잇게 되었다. 철종(哲宗)이 바로 그다. 철종은 즉위한 뒤 아버지 광을 대원군(大院君)으로 추봉(追封)하였으며, 승지(承旨)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김문근을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하였다.

철종은 즉위하였을 때 이미 19세였지만, 순원왕후가 여전히 수렴청정을 하여 모든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은 김문근이 결정하였으며, 그의 일족은 모두 요직을 차지하여, 김씨의 권세는 조정의 안팎을 휩쓸었다. 이때 삼정(三政) 【전부(田賦), 군적(軍籍), 환곡(還穀, 곡물을 사창(社倉)에 저장하여, 매년 봄에 대여해 주고, 가을에 거둬들이는 것)의 세 가지를 말한다.】 은 문란하여 폐해가 극에 달하였고 또 여러 차례 큰 역병이 발생하여 사방의 인민들은 서로 모여 난을 일으켰으므로, 왕은 관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을 대책을 강구하였으며, 이에 고쳐 바로잡을 항목들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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