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9. 대원군(大院君)의 집정
  • 비고(備考)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흥선 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흥선 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이 태왕의 즉위와 함께 흥선군은 왕의 생부인 까닭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해지고, 그의 부인은 왕의 생모로서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에 봉해졌다. 이때 대원군은 44세, 부인은 46세였다. 흥선대원군이 들어서면서부터 대원군이란 대통(大統)을 승계한 국왕의 실부(實父)를 이르는 작호(爵號)가 되었으며, 부대부인(府大夫人)이란 왕의 생모를 이르는 작호가 되었다. 후에 이 태왕이 황제(皇帝)라고 칭하게 되자 대원군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하였다. 【메이지 40년 8월】 국왕의 즉위할 때 생존한 대원군이 있었던 경우는 아직 전례가 없었다.

대왕대비는 교지를 내려 백관(百官)과 관리들로 하여금 사무를 대원군에게 먼저 아뢰도록 하였으므로, 국가의 실권은 대원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때문에 이 태왕 10년 【메이지 6년】 에 대원군이 은퇴할 때까지를 임시로 대원군의 집정 시대라고 한다. 대원군은 그가 집정하던 기간에 매우 슬기롭고 용감하게 결단하여 내정(內政)을 크게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먼저 전 시대의 외척인 김씨 일족 중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자기의 수족들로 그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또 새로 인재를 등용하면서 추호도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사색(四色)에 관련짓지 않았으며, 종래에 직책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서북인(西北人), 개성인(開城人)에게도 역시 높은 직책을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종래 당쟁의 소굴이자 선비들의 횡포의 중심으로 간주되던 서원(書院), 향사(鄕祠)의 철폐를 단행하였으며, 제도를 개선하고 재정(財政)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경계하고 풍속을 바로잡았다. 또한 경복궁(景福宮)의 건설을 시도하여 서민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추호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왕가(王家)의 위엄을 내보였다. 저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의 법전(法典)들도 역시 이 기간에 편찬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정치는 좋은 면이 적지 않았지만 인민이 고통을 받는 점도 역시 많았다.

이 태왕 3년에 서교도(西敎徒)의 소탕을 감행하였으며, 그 때문에 프랑스 함선이 침략해 오자 그들을 강화에서 물리쳤고, 또 8년에 미국 군함이 다가오자 이들도 역시 강화에서 물리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유럽 여러 나라들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쇄국양이(鎖國攘夷)의 방침을 고수하고, 일본이 조선과의 우호를 회복하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응하지 않았다. 종래 사대주의에 따라 복종하여 섬기던 중국 외에는 어떤 외국과도 교류하는 것을 피하였으므로, 세계의 진취적인 움직임에 심각하게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원군의 집권이 점차 길어지자 실정(失政)도 역시 점점 드러나 인심을 잃었으므로, 최익현(崔益鉉) 등은 상소를 올려 그를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10년】 이리하여 대원군은 결심하여 이 태왕 10년에 54세의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 북문(北門) 밖의 산장(山莊)에 칩거하면서 때때로 산과 들을 거닐었다. 이에 앞서, 대원군은 그의 부인의 일족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삼기로 하고, 3년 3월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그러나 왕비 민씨는 궁궐에 들어온 후 오래지 않아 대원군과 사이가 나빠졌는데, 민씨 일족인 민승호(閔升鎬) 【민치록의 양자】 와 민태호(閔台鎬) 등은 연달아 등용되어 중추적인 정무에 관여하였으며, 특히 대원군이 은퇴한 후에는 국정을 좌우하여, 대원군의 방침을 완전히 바꾸고 대원군과 같은 편이었던 사람들을 몰아냈다. 이에 더하여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인 이재선(李載先)은 대역(大逆)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으므로, 【이 태왕 18년, 메이지 14년】 【제10과 비고 5 「이재선(李載先) 사건」 참조】 대원군 일파와 민씨 일파의 거리는 더욱 멀어져, 그들의 충돌은 조만간 피하기 어려운 형세였다. 때마침 임오년(壬午年) 【이 태왕 19년, 메이지 15년】 에 훈국(訓局)의 병사들이 난을 일으키자 대원군은 다시 나와서 잠시 그 국면에 대처하였다. 이때 청나라 정부는 신속히 장병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소란을 진압하였으며, 또한 계략을 써서 대원군을 천진(天津)으로 연행해 갔으며, 그때부터 보정부(保定府) 【직예성(直隷省)의 성(城) 소재지】 에 보냈으므로, 대원군은 이후 완전히 정계를 떠나 하는 일 없이 4년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갑신년(甲申年)의 변란(變亂) 【이 태왕 21년, 메이지 17년】 후에 한국 조정의 태도가 청나라에서 떠나 러시아로 기우는 형세를 보이자, 청나라의 재상 이홍장(李鴻章)은 대원군을 귀국시켜 청나라와 한국의 밀접한 관계를 꾀하였으므로, 대원군은 이 태왕 22년 【메이지 18년】 8월에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이후 대부분 운현궁(雲峴宮)에서 한가하게 살았다.

31년 갑오년(甲午年) 【메이지 27년】 에 일본과 청나라 양국은 전쟁의 실마리가 생기자, 형세는 급격히 변화하여 대원군은 세 번째로 나와서 정국에 대처하였으며, 일본에 기대어 폐정(弊政)을 개혁하려고 하여, 이른바 갑오혁신(甲午革新)의 실마리를 열었지만 몇 개월 만에 은퇴하였다. 그 후 머지않아 법무협판(法務協辦) 김학우(金鶴羽) 암살 사건이 일어나, 대원군의 부하들 대다수가 이에 관련되어 사형 또는 유배에 처해졌으며, 대원군의 사랑하는 손자 【이재면(李載冕)의 장자(長子)】 이준용(李埈鎔)은 그 주모자로서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되었다. 【이 태왕 32년 4월】 일청전쟁(日淸戰爭) 후에는 민씨 일파가 다시 조정에서 일어나 모처럼 새롭게 뜯어고칠 기회로 나아가던 국정은 또다시 역전되었으며, 친일파는 점차 세력을 잃고 친러파가 홀로 강해졌다. 대원군은 이러한 형세를 간과할 수 없어 을미년(乙未年) 【이 태왕 32년, 메이지 28년】 8월에 갑자기 병사들을 이끌고 입궐하여, 국태공(國太公)의 이름으로 유지(諭旨)를 발표하고, 모든 친러파를 몰아내고 친일파로 정부를 조직하였다. 이 소란의 과정에서 왕후(王后) 민씨 【갑오년 12월 이후에는 왕후라고 불렀다.】 는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이후 대원군은 뜻을 완전히 정계(政界)에서 끊었는데, 2년이 지나 광무(光武) 원년 【메이지 30년】 12월에 부대부인이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2월에 대원군도 세상을 떠났다. 대원군은 향년 79세, 부대부인은 80세였다. 처음에는 둘 다 경성 교외의 공덕리(孔德里)에 매장되었다가, 융희(隆熙) 2년 【메이지 40년】 1월에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雲泉面) 대덕동(大德洞) 【지금의 임진면(臨津面) 운천리(雲泉里】 로 이장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흥선대원왕묘지명(興宣大院王墓誌銘)』·『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이왕가계보(李王家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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