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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함이 공격해 온 시말(始末)

선교사 리델이 천진(天津)에 와서 제독 로즈에게 조선에서 수난을 당한 사정을 알리자, 로즈는 청나라 주재 프랑스 공사(公使) 벨로네 【Bellonet】 와 계책을 세우고, 본국 정부의 허락을 얻을 겨를도 없이 곧바로 원정을 결정하였다. 아마 벨로네는 서기 1860년 【조선 철종 11년】 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 침입에 성공한 것을 회상하고, 또 당시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의 강력한 위세를 믿고, 원정의 일을 가볍게 여겼을 것이다. 이때 벨로네는 청나라 정부에 조선의 일을 비난하였으므로, 청나라는 이 태왕 3년 【게이오 2년 병인년, 서기 1866년】 7월 【양력 8월】 에 조선 정부에 서한을 보내 주의를 주었으며, 또한 프랑스 군함이 습격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대원군은 명령을 내려 활발하게 성곽을 수리하게 하고, 특히 강화도의 포루(砲壘)를 증축하도록 하였는데, 과연 8월 11일 【양력 9월 21일】 에 프랑스 군함 2척이 강화해협에서 한강을 거슬러 오르며 산하(山河)의 형세를 정찰하였다. 그런데 9월 【양력 10월】 에 프랑스 군함 7척이 다시 경기(京畿) 연해(沿海)에 다가왔으며, 같은 달 8일 【양력 10월 6일】 에 프랑스군은 갑자기 상륙하여 강화성(江華城)을 공격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이인기(李寅夔)는 성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프랑스인들은 또한 같은 달 18일 【양력 10월 26일】 에 강화도의 건너편 해안인 통진(通津)에 군대를 보내 경성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를 차지한 지 한 달쯤 되자 청사(廳舍)를 불사르고 사람과 가축들을 해쳤으며, 또한 화물과 전적(典籍) 등을 많이 약탈하였다.

이때 순무사(巡撫使) 이경하(李景夏)는 경성을 엄격히 경계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으며, 병사들을 크게 징발하여 방비를 단단히 하였다. 유격장(遊擊將) 양헌수(梁憲洙)는 강화도 남쪽은 아직 적이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고, 산포수(山砲手) 【산과 들에서 사냥을 하는 엽사들로 이루어진 부대】 5백여 명을 이끌고 밤을 틈타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웅거하였다. 제독 로즈는 그를 정찰하여 알아내고, 10월 13일 【양력 11월 9일】 에 16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조선군은 잘 싸워 프랑스 병사들은 결국 이기지 못하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에 제독은 명령을 내려 강화를 불태우고, 전에 출병하여 대치하고 있던 통진산성(通津山城)도 포기하고, 4일 밤에 승선하여 영종도 앞바다의 정박소로 물러났으며, 그 후 며칠이 지나 조선을 떠났다. 프랑스 군대가 패배하여 물러난 것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군대가 서양의 군대를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배외(排外)의 기세는 점점 드세졌으며, 천주교도를 찾아내는 일은 더욱 엄격해져 살육당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았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조선 정부는 쓰시마의 소(宗)씨를 통해 이 사건의 전말을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에 알렸다. 【『순무천총양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憲洙勝戰碑)』·『일성록(日省錄)』·『예조전말보고서(禮曹顚末報告書)』·그리피스(Griffis) 저, 『조선(朝鮮)』·『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당시 신문(新聞)과 역문(譯文)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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