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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의 분묘 발굴 사건

프랑스 군함이 공격해 온 일이 있은 지 2년 후, 즉 이 태왕(李太王) 5년 【메이지 원년 무진년(戊辰年), 서기 1868년】 에 갑자기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을 오페르트 분묘발굴사건이라고 한다.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는 유태인 출신의 북부 독일인으로, 선원이 되어 동아시아 여러 항구들 간의 항해에 종사하였으며, 조선의 풍물 및 부원(富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차이나호’라는 680톤 기선(汽船)과 작은 하천을 거슬러 항해할 수 있는, 크레타호라는 소형 기정(汽艇)도 갖추어, 상해(上海)를 출발하여 나가사키(長崎)에 들렀다가 조선의 서해안으로 향하였다. 그 승조원(乘組員)은 유럽인, 말레이시아인, 중국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에 상륙한 목적은 옛날 대원군 때문에 천주교가 당하였던 참화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상해 영사 세워드의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의 왕릉을 파헤쳐 시체를 가져가 인질로 삼으려고 하였다고 한다.】 차이나호는 같은 해 4월 16일 【양력 5월 8일】 에 충청도의 아산만(牙山灣)에 도착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다시 작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 오페르트 이하 승조원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밤을 틈타 상륙하여, 18일 【양력 5월 10일】 에 그곳에서 몇 리(里) 떨어져 있는 덕산(德山) 【지금의 영산군(靈山郡) 덕산면】 에 도달하였다. 덕산은 바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郡) 구(球)의 분묘가 있는 곳이다. 그들은 곧바로 남연군의 묘를 발굴하려고 하였지만, 견고하여 쉽게 관곽(棺槨)에 도달할 수 없었으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날이 곧 밝자 부근 주민들에게 발견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배에 올라타고 영종도첨사(永宗島僉使) 등이 격퇴하자 도망쳐 돌아갔다. 이 때문에 조선 정부는 조철증(趙喆增)이라는 자가 서양인과 내통하고 길잡이가 되었다고 하여 그를 체포하였으므로 조철증은 결국 자살하였다. 또 상해에서 한 미국인은 전주(錢主)로서 이 사건에 관계하였다고 하여 그를 구속하였지만 미국 영사관에서 심문한 결과 증거가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면소(免訴)하였다. 【『일성록(日省錄)』·그리피스(Griffis) 저, 『조선(朝鮮)』·오페르트 저, 『금쇄국(禁鎖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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