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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군함이 공격해 온 시말

미국의 사절 페리가 처음으로 일본에 온 것은, 조선 철종 【제25대】 4년 【카에이(嘉永) 6년 계축년(癸丑年), 서기 1853년】 이고, 이어서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철종 9년 【안세이(安政) 5년 무오년(戊午年), 서기 1858년】 에 해당한다. 조약이 체결된 무렵부터 미국 선박이 극동(極東)에 왕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이 조선 근해에서 난파된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 태왕 3년 【게이오 2년 병인년, 서기 1866년】 봄, 천주교도의 소탕을 시작함에 따라 머지않아 미국 선박 서프라이즈 【Surprise】 호가 평안도 철산(鐵山) 앞바다에서 난파되었는데, 【5월 12일, 양력 6월 24일】 조선 관헌(官憲)들의 우호적인 도움으로 그 선원들은 무사히 중국으로 귀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 【General Sherman】 호는 무장을 갖추고, 통상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반각도(半角島)에 이르렀는데, 배의 밑바닥이 얕은 여울에 박혀 어찌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 승조원들은 지방 관민(官民)들과 충돌하여 모두 죽임을 당하고, 선체도 완전히 불태워졌다. 【7월 25일, 음력 9월 4일】 그 후 미국은 이 배의 흔적을 찾은 지 수년이 지나서 대략 그 진상을 알게 되자, 이 태왕 8년 【메이지 4년, 신미년, 서기 1871년】 4월에 해군 제독 로저스 【Rear Admiral J. Rodgers, 노적(魯籍)】 를 파견하여, 전함 몇 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도록 하였다. 해군 제독을 파견한 목적은 아마 선박 난파의 경우에 관한 협약 및 만약 가능하다면 통상조약도 체결하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대원군은 미국 군함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과 판관(判官) 이창회(李昌會) 등을 파견하여 강화도 연안의 방비를 엄중히 하도록 하였다. 이미 미국 함대는 4월 중순 【양력 5월 하순】 에 강화도 근해에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측량을 시작하였으며, 때때로 포루(砲壘)의 수비병들과 사격을 주고받았다. 4월 23일 【양력 6월 10일】 에 미군은 마침내 초지(草芝) 【강화도 동남쪽 끝】 해안에서 강화도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하여, 24일 【양력 6월 11일】 에 광성진(廣城鎭)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마침내 그곳을 점령하였는데, 조선군은 사상자가 350명에 달하였고 중군(中軍) 어재연도 전사하였다. 미군 가운데에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므로, 미군은 당초의 목적이 쉽게 달성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튿날 광성진의 남쪽 해안에서 승선하여 5월 중순까지 영종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다가 5월 17일 【양력 7월 5일】 에 지부(芝罘)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세계 열강을 별볼일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쇄국배외(鎖國排外)의 기세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마침내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여러 가지 일기(日記), 영자(英字) 신문 기사(記事), 그리피스(Griffis) 저, 『조선(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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