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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10. 강화도 사건과 임오 정변(壬午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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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오정변(壬午政變)

임오정변(壬午政變)

이 무렵 조선 정부는 종래의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구식(舊式) 군대 외에 따로 신식(新式)의 한 부대를 설립하고, 일본에서 무관(武官)을 초빙하여 그 훈련을 위촉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15년에 이르러 국고(國庫)가 크게 부족해지자 구식 군대에게 봉료(俸料) 【봉급으로 주는 쌀】 를 지급하지 못한 지 십수 개월이 지났다. 이리하여 구식 군대의 소란이 그치지 않았는데, 겨우 1개월 치 봉료를 지급하게 되자, 창리(倉吏)가 부정을 저질러 썩은 쌀을 지급하였으며, 또 그 액수도 매우 불공평하였다. 병사들은 분노하여 창리에게 폭행을 가하였다. 정부는 이에 그 주모자를 체포하여 그를 법으로 처벌하자, 여러 군영(軍營)의 병사들은 갑자기 격앙되어 무기를 들고 왕궁(王宮)에 난입하여 폭동을 일으키며, 또한 민씨 일족의 저택을 파손하였다. 이때 왕비의 신변이 위태로웠지만, 간신히 황궁을 빠져나와 몰래 충주(忠州)의 산속으로 숨었다. 대원군은 왕의 부름에 따라 급히 궁궐로 갔으며 다시 정치의 임무를 맡았다. 일본과 조선은 예전에 조약을 맺어 국교(國交)가 점차 개선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여전히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정변(政變)에 편승한 폭도의 한 부대는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질렀으므로, 공사(公使)인 하나부사 요시모토 이하는 포위를 뚫고 가까스로 위기를 피해, 곧바로 인천으로 가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일본국 정부는 이에 하나부사 공사를 다시 조선에 보내 국왕을 알현하고 요구를 제시하게 하였다. 이때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교섭은 매우 곤란해지자, 하나부사 공사 등은 일단 제물포(濟物浦) 【지금의 인천】 로 철수하여, 국교는 곧 파괴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청나라 군함에 연행되어 가자, 조선 정부의 논의는 갑자기 완전히 바뀌어, 제물포에서 담판을 열고 (1) 흉도를 체포하여 그들을 처벌할 것 (2) 피해자를 후하게 장례 치를 것 (3) 손해를 배상할 것 (4) 사절을 파견하여 일본에 사죄할 것 등을 약속하였다. 【메이지 15년 8월, 이 태왕 19년】 위의 정변을 임오정변(壬午政變)이라고 하며, 위의 조약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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