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기술한 폭동이 일어나자 국왕은 청나라 정부에 급보(急報)를 보내 급히 원조를 요구하였다. 청나라 정부는 신속히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많은 병사들을 경성으로 수송하였으며, 또한 대원군을 꾀어내어 강제로 군함에 태워 천진(天津)으로 보내고 그를 그 나라 【보정부(保定府)】 에 억류하였다. 이때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여겨졌던 왕비는 그 후 무사히 충주에서 궁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청나라의 출병으로 쉽게 질서를 회복하고 뒷수습을 잘 할 수 있었지만,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는 이때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청나라 군대는 경성에 주둔하였으며, 청나라 사신인 원세개(袁世凱)는 사사건건 국사에 간섭하였는데, 청나라 정부가 추천한 독일인 【멜렌드로프】 을 조선 정부에서 외교 고문으로 채용하게 하였으며, 영국인 【하트】 에게 세관(稅關)의 업무를 감독하게 하고, 군대는 모두 청나라식으로 바꾸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