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11.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갑오혁신(甲午革新)
  • 비고(備考)
  • 김옥균(金玉均)

김옥균(金玉均)

김옥균(金玉均)은 자(字)가 백온(伯溫)이고, 호가 고우(古愚) 또는 고균(古筠)이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경상북도】 으로, 철종 2년 【카에이(嘉永) 4년】 에 경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병태(金炳台)이다. 자라서 집을 나와 일가인 김병기(金炳基)의 집에 계자로 들어갔다. 22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이 태왕 19년 【메이지 15년】 에 박영효가 임오변란(壬午變亂) 후의 수신대사(修身大使)로 일본에 파견되자, 김옥균도 역시 일행 가운데 참가하였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일본에 간 것이다. 이듬해 21년 【메이지 16년】 에 포경사(捕鯨使)에 임명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외아문(外衙門)의 참의(參議)로 진급하였다. 이해에 그는 육군호산학교(陸軍戶山學校) 입학생 17명을 인솔하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야(朝野)의 명사(名士)들과 교유하여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우시바 타쿠죠(牛場卓三)와 다카하시 세이신(高橋正信) 등 여러 명의 고문(顧問)들을 고용하였다. 때마침 조선 주재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경성에 부임해 왔다. 함께 메이지마루(明治丸)에 탑승하여 세모(歲暮) 【메이지 16년 1월 7일】 에 귀국하였다.

김옥균은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 세계의 대세(大勢)에 밝은 소장(少壯) 기예(氣銳)들과 의기투합하여, 몰래 독립당(獨立黨)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항상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루한 사대당(事大黨)을 박멸함으로써, 국정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려고 꾀하였다. 21년 10월 17일 【메이지 17년 12월 4일】 에 독립당원들은 우정국(郵征局) 개설 축하일에 거사하여, 민영목(閔泳穆), 민태호(閔台鎬) 이하 6명의 반대당 우두머리들을 살해하고, 곧바로 독립당 정부를 조직하여, 김옥균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사대당을 지원하여 습격해오자, 국왕은 청나라 군대에게 투항하였으므로, 독립당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김옥균은 박영효와 함께 일단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으며, 후에 인천에서 일본 우선(郵船)인 센넨마루(千年丸)에 타고 나가사키항(長崎港)에 상륙하였다.

조선 내에 있던 독립당의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박멸되었지만, 일본으로 망명한 우두머리 박영효와 김옥균에 대한 사대당의 증오는 놀랄 만큼 심하였다. 사대당은 첩자를 보내 그들의 동정을 정찰하거나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하는 등 모든 수단을 다하였다.

이 태왕 22년 【메이지 18년】 에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 【호(號)를 하죠(馬城)라고 한다.】 가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과 공모하여 조선의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일본 정부는 곧바로 관계자 약 30명을 체포하여, 재앙을 미리 방지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당국자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더욱 김옥균을 제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일본 정부는 국제적인 관계 및 국내의 공안(公安) 유지 차원에서, 메이지 19년 6월 11일에 김옥균에게 도쿄(東京)를 떠날 것을 명하고,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 【도쿄부(東京府) 아래】 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건강이 매우 손상되었으므로, 정부의 허가를 얻어 홋카이도(北海島)로 옮겨 갔는데, 메이지 24년에 풀려나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조선의 정객(政客) 홍종우(洪鍾宇)라는 사람이 언젠가 도쿄에 와서, 교묘하게 김옥균에게 접근하여, 시국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개탄하고, 청나라와 결탁하여 국세(國勢)를 만회할 것을 역설한 적이 있었다. 김옥균은 생각건대 우리 일본에서 떠돌면서 생활한 지 10년인데, 뜻을 아직 이루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중국으로 건너가 크게 일을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마침내 메이지 27년 3월 11일에 청나라 공사관의 통역관인 오보인(吳葆仁), 홍종우 및 시종인 기다하라 엔지(北原延次) 등 세 사람과 함께 도쿄를 떠나, 도중에 오사카(大阪)에 들렀다가, 같은 달 27일에 중국 상해(上海)에 안착하여, 일본 여관인 동화양행(東和洋行)에 투숙하였다. 이리하여 홍종우는 이튿날인 28일에 시종이 없는 틈을 엿보았다가 권총으로 김옥균을 격살(擊殺)하였다. 이때가 이 태왕(이 태왕) 31년 2월 22일이다. 김옥균이 사망하였을 때 나이는 44세였다.

홍종우는 일단 몸을 피해 상해 부근의 민가(民家)에 숨었는데, 그날 밤 청나라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관헌은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는 태도로 보였는데, 김옥균의 사체를 군함인 위원호(威遠號)에게 싣고 홍종우를 함께 태워 인천항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조선 정부는 김옥균에게 부과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양화진(楊花鎭) 【한강 연안】 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의 극형에 처하고, 머리와 사지(四肢)를 잘라내어 그것을 매달아 놓았다. 【3월 9일】 이 상세한 보고가 일본에 전해지자, 청나라의 조치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점차 일본과 청나라 양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만세계보(萬世系譜)』·『대동기년(大東紀年)』·『김옥균전(金玉均傳)』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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