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11.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갑오혁신(甲午革新)
  • 비고(備考)
  • 홍영식(洪英植)

홍영식(洪英植)

홍영식(洪英植)은 남양(南陽) 【경기도】 의 이름난 홍씨(洪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둘째 아들이며 홍만식(洪萬植)의 동생이다. 철종 6년 【안세이(安政) 2년】 에 경성(京城)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중육(仲育)이며, 호는 없다. 어려서 뛰어난 총명함과 빼어난 재능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18세 때 문과에 등제하였다. 이 태왕 18년 【메이지 14년】 4월에, 정부는 조병직(趙秉稷) 이하 십 수 명을 시찰위원(視察委員)으로 일본에 파견하여, 정치, 병제(兵制), 교육, 산업 등 전반에 걸쳐 조사를 수행하게 하였다. 홍영식도 역시 선발되어 일행에 참가하였으며, 일을 완료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19년 임오년(壬午年) 【메이지 15년】 의 정변(政變) 후에 박영효(朴泳孝)가 수신사(修信使)로서 일본에 갈 때, 홍영식은 수행원 중 한 사람으로서 다시 일본에 건너갔다. 이듬해 6월에 또 박영효를 수행하여 미국에 사절로 가서, 제도·문물을 자세하게 시찰하고, 21년 봄에 무사히 귀국하였다.

이렇게 홍영식은 여러 차례 해외에 파견되어, 일본과 미국 등 선진국의 문물을 접촉하고, 그 국운(國運)의 융성함을 보고 선망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당시의 조선을 돌아보면, 청나라는 음으로 양으로 그 내치(內治)와 외교(外交)에 간섭하였고, 또 청나라를 섬기려는 이른바 사대당(事大黨)의 대다수는 보수(保守)를 좋아하고 개혁을 좋아하지 않았다. 홍영식은 이에 박영효, 김옥균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당(獨立黨)을 조직하였다. 홍영식은 또 별입시(別入侍)로서 궁중에 출입하였으므로, 국왕과 친근한 기회를 얻어 개혁을 종용하였다. 마침내 우편제도(郵便制度)의 채용을 진언하여, 자신이 창설한 국(局)을 맡았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두세 명의 고문을 초빙하고, 필수 요원들은 도쿄인쇄국(東京印刷局)에서 보내기로 하였다. 이윽고 우편의 새로운 관제(官制)가 갖추어지고, 우정국(郵征局)을 경성 북부 전동(典洞)에 설치하였으며, 홍영식은 그 총판(總辨)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때 잠시 독립당 정부가 성립되자, 이 당의 우두머리로서 홍영식은 우의정에, 김옥균은 호조판서에 임명되었고, 박영효는 전후(前後) 양쪽 영(營)의 대장(大將)과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겸직하였다. 그러나 중국 군대가 왕궁에 갑자기 들어와 일본 군대와 싸우게 되어 형세가 매우 불리하였으므로, 박영효, 김옥균 등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으로 피하였다. 홍영식은 끝까지 왕을 호종(扈從)하여 궁중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십 수 명과 함께 왕을 받들고 북악(北岳)의 관우묘(關羽廟) 안으로 숨었지만, 중국 병사들에게 발견되었으며, 결국 반란군 군중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의 아버지인 홍순목 및 처자(妻子)들은 이 변고를 듣고 모두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만세계보(萬世系譜)』·『대동기년(大東紀年)』·『한반도(韓半島)』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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