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11.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갑오혁신(甲午革新)
  • 비고(備考)
  • 동학당(東學黨)

동학당(東學黨)

메이지 27〜28년의 전쟁의 도화선이 된 동학(東學)은, 처음에 경주(慶州) 현곡면(見谷面) 용담리(龍潭里) 사람인 최제우(崔濟愚) 【제1대의 호는 수운(水雲)】 가 주창하였다. 최제우는 처음의 이름이 복술(福述)이었는데, 어려서부터 경주와 울산 지방을 돌아다니며 목면(木棉)의 매매를 업으로 삼았다. 그는 어느 날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사를 올린 결과, 하늘에서 한 권의 책을 받았다고 하는데, 책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재앙을 면하게 해 주었다. 그가 가르치는 내용은 쉽고 간명하여 일반인들의 귀에 쉽게 들어왔으며, 또한 그때 인심의 변화가 매우 심한 시기였으므로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교도들은 그 가르침을 동학도(東學道)라고 하며, 스스로를 도인(道人)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통상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동학당(東學黨)이라고 불렀다. 당시 조선의 상태를 깊이 살펴보면, 불교는 황폐가 극에 달하였으며, 유교는 일반적으로 행해졌지만 단지 허례(虛禮)와 형식(形式)에 얽매여 그 정신을 망각하였다. 한편으로 정조(正祖) 무렵부터 반도의 상하 계층에 침투한 천주교(天主敎)는 철종(哲宗) 때 탄압이 느슨해진 틈을 타 국내에 만연되어, 민심은 그 귀추를 알 수 없는 양상이었다. 【제9과 비고 8 「천주교도의 살육」 참조.】 이때에 즈음하여, 최제우는 반도에서 옛날부터 전해오던 유(儒)·불(佛)·도(道) 3교(敎)의 장점들을 취하여 하나의 교법(敎法)을 만들고, 또한 교묘하게 기독교를 안배하여,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인 천주(天主) 【또는 상제(上帝)라고도 부른다.】 의 실재(實在)를 인정하고, 인간의 화복(禍福)을 담당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그가 이 종교를 주창한 것은 바로 우리의 옛 풍속과 관습을 파괴하는 천주교 즉 서학(西學)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므로 서학에 대해 스스로 동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혹은 중국학에 대한 동쪽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학에 반대되는 이름이 아니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종교는 주자학(朱子學)만을 정학(正學)이라고 받들고 존경하던 당국의 심기를 건드렸으며, 세상을 속이고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종교로 간주되어, 이단사학(異端邪學)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따라서 유생(儒生)들이 크게 박해를 받았다. 최제우는 결국 체포되어 【이 태왕이 즉위한 해, 분큐(文久) 3년 12월】 이 태왕 원년 【겐지(元治) 원년】 3월에 대구의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최제우의 뜻을 계승하여 그 무리들을 통할하여 관리한 사람은 최시형(崔時亨) 【제2대, 호는 해월(海月)】 이었다. 그도 역시 경주 사람으로, 확고부동한 정신으로 교세(敎勢)의 확장에 힘써, 메이지 13년 【이 태왕 17년】 에 이 종교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는 등, 도(道)를 이어받아 지켜나가는 데에 힘썼다. 이 무렵 조선의 정치는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으므로 지방의 관헌(官憲)들은 백성들을 매우 힘들게 하였다. 특히 동학당을 박멸시킨다는 명분으로, 교도(敎徒)들에게 박해를 가한 것은 물론이고, 폭력을 사용하여 양민을 학대하고, 재화를 빼앗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리하여 동학의 교도들은 결속하여 관헌들을 공격하려 하고, 교조(敎祖)인 수운(水雲)에 대한 신원(伸寃)과 탐관오리들의 박해에 대해 상소를 올려 탄원하는 등 갖가지 운동을 벌이고, 곳곳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이것이 메이지 25〜26년 무렵의 형세였다. 이처럼 동학당은 혹독한 관리들에 반항할 뿐만 아니라, 외세의 배격을 천명하고, 수 년 전부터 적대시해 오던 예수교도들에 대한 배격도 표명하였으므로, 거류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불안한 생각에 휩싸였다. 당국은 그들을 진압하려고 하였지만, 강력한 군비(軍備)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외국의 군대를 빌리려는 논의가 이루어질 정도였다. 원래 동학당은 조선이 점차 쇠약해지고 정치가 문란해진 것에 편승하여 일어난 것으로, 삼남(三南) 지방에서 그 세력이 가장 활발하였다. 이에 정부는 전라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용직(李用直)에게 명하여 모여 있는 무리들을 타일러 해산시키도록 하였으며, 특히 충청도 보은군(報恩郡)에 웅거하고 있던 무리들이 창궐하였으므로 특별히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삼아 그들을 회유하여 해산시키도록 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지방관들이 포학하였기 때문에 함경도와 황해도 지방과 개성 등에서 인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메이지 27년 3월 하순 【이 태왕 31년 갑오년 2월 하순】 전라도 고부(古阜)의 군민(郡民)들이 군수(郡守)인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을 견디지 못하고 난을 일으키자, 같은 지역의 부유한 농민으로 동학당의 우두머리였던 전봉준(全琫準)은 ‘제폭구민(除暴救民)’을 표방하고 궐기에 가담하여 그 세력이 강렬해졌다. 정부는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임명하여 난을 일으킨 백성들을 위무하고 타일러 진압하도록 하였지만, 이용태는 주저하면서 출발하지 않았다. 도리어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였으므로 소란은 더욱 확대되어, 호남과 호서 지방을 휩쓸었다. 도적들은 나아가 전주(全州)의 감영(監營)을 압박하자 감사 김문현은 성을 포기하고 도피하였다. 이리하여 정부는 5월에 예전에 전라병사(全羅兵使)였던 홍계훈(洪啓薰)을 양호토포사(兩湖討捕使) 【후에 초토사(招討使)라고 불렀다.】 로 삼아 병사 8백 명을 이끌고 군산(群山)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폭도들은 각지에서 빈번하게 봉기하였는데, 경상도 김해부사(金海府使) 조준구(趙駿九)도 결국 난을 일으킨 백성들이 추방하여, 삼남에 정령(政令)이 미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도적들의 세력이 창궐하여 관군(官軍)들이 여러 곳에서 패배를 거듭하여, 급한 보고가 빈번히 전해지고, 외국에서 군대를 빌려오는 논의가 다시 정부 부처 내에서 일었다. 5월 하순에 도적들은 마침내 전주를 함락하고, 다시 여산(礪山) 등의 관병들을 격파하였으므로, 초토사 홍계훈은 열세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외국에서 군대를 빌리자는 건의를 글로 올렸다. 이 때문에 6월 3일 청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하였으므로, 청나라 장수 섭지초(葉志超), 부장(副將) 섭사성(聶士成)이 3영(營)의 병사들을 이끌고 위해위(威海衛)를 출발하여, 그 선봉은 6월 6일에 이미 아산(牙山)에 도착하였다. 이때 일본도 역시 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기로 결정하고,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는 1개 여단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하여 같은 달 12일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조선 정부는 한편으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함과 함께 이원회(李元會)를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증원군(增援軍) 약 9백 명을 이끌고 경성을 출발하게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청나라 군대가 아산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학당은 세력이 갑자기 약해졌으며, 6월 7일에 홍계훈과 이원회는 군대를 합쳐 도적들을 토벌하여 전주를 수복하였고 도적의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승리 소식이 경성에 전해지자 사대문에 방(榜)을 붙였으며, 곧 초토사는 도적 무리의 잔당들을 평정하고, 6월 19일에 군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일본과 청나라 양국의 국교는 파괴되고, 조선은 일본에게 청나라 군대를 격퇴해 줄 것을 의뢰하였으며, 【7월 25일】 청나라 군대는 성환(成歡) 및 평양(平壤)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완전히 반도에서 소탕되었다. 이 사이에 동학군은 다시 세력을 키워 삼남 지방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에 조선 군대 2개 대대, 일본 군대 1개 대대가 파견되어 그들을 토벌하였으며, 메이지 28년 1월에 도적들의 수괴 전봉준(全琫準)도 전라도에서 체포되어 소요는 잠시 진정되었다. 【전봉준은 1월 5일에 체포되어, 4월 25일에 경성에서 교살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정부는 온 힘을 다해 동학당을 추격하는 데 노력하여 우두머리인 최시형도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었고 메이지 31년 【광무(光武) 2년】 7월에 경성에서 처형되었다. 손병희(孫秉熙) 【제3대, 호는 의암(義庵)】 는 그 뒤를 이어 교주가 되었으며, 메이지 38년 【광무 9년】 에 동학이라는 이름을 천도교(天道敎)라고 고쳤다. 【아래 제14과 비고 11 「일진회(一進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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