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청나라의 국제 관계가 점차 위급해질 때 청나라는 오로지 전쟁 준비에 급급하였다. 특히 위해위(威海衛)는 발해만(渤海灣) 어귀를 제압하는 군항이었으므로 경계를 가장 엄중히 하고,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이곳에 집중하여 출동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청나라 정부는 또 청나라 장수 섭사성이 보낸 전보 요청을 받아들여, 원병(援兵)으로 병사 약 4천 명을 8척의 운송선에 나누어 태우고 태고(太沽), 여순구(旅順口), 위해위 등 여러 항구에서부터 해로(海路)로 아산(牙山)을 향해 출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보가 천진에서 일본에 전해지자 이에 우리의 제1유격함대 사령장관(司令長官) 해군 소장 츠보이 코죠(坪井航三)는 조선 근해를 경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요시노(吉野), 나니와(浪速), 아키츠시마(秋津洲) 등 세 척의 함선을 이끌고 7월 23일에 사세보(佐世保) 군항(軍港)을 출항하여 전라도의 해각(海角)을 우회하여, 25일 새벽에 풍도(豐島) 부근에 도착하였다. 【충청남도 아산 앞바다】
때마침 청나라 군함인 제원(濟遠), 광을(廣乙) 등 두 척과 마주치자 제원호는 갑자기 포문을 열고 우리의 요시노호를 공격하였으므로, 우리는 응전하여 그를 격파하자 제원호는 먼저 달아나고 광을호는 좌초하여 승무원들이 스스로 불을 질러 군함을 버렸다. 이때 청나라 군함 조강호(操江號)는 그들의 육군 병사 약 천 명을 태운 영국 운송선 고승호(高陞號)와 함께 왔는데 이러한 상황을 보고 돌아서 도망쳤다. 아키츠시마호는 조강호에 다가가 그들을 항복시키고, 나니와호는 고승호에게 따라오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배 안에 타고 있던 청나라 병사들은 영국인 선장의 명령을 듣지 못하여 우리에게 반항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나니와호의 함장인 해군 대좌(大佐)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지체 없이 결국 고승호를 격침시켰다. 이는 실로 27〜28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