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11.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갑오혁신(甲午革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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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지(明治) 27〜28년의 전쟁
  • 평양(平壤)의 전투

평양(平壤)의 전투

청나라와 전쟁이 시작되자, 우리 정부는 제5사단의 나머지 및 제3사단 제18연대에 동원령을 내리고, 제5사단장 육군 중장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의 지휘 하에 급히 우지나(宇品)에서 출항하도록 하였다. 이때 청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 양 방면에서 점차 평양으로 집결하였으며, 성환의 패잔병들도 역시 그에 가담하여 기회를 보아 남하하려는 기세였다. 평양은 조선 서부의 요충지로서, 전면에 대동강을 두고 있고 구릉이 기복을 이루며 사방은 견고한 성벽이 둘러져 있다. 더구나 그 수비병들은 청나라 군대 제일의 정예부대인 봉천(奉天)의 의자군(毅字軍), 이홍장(李鴻章) 휘하의 성자군(盛字軍) 등으로, 위여귀(衛汝貴), 좌보귀(左寶貴), 마옥곤(馬玉崑) 등이 그 장수들이었다. 전체 병력은 대략 1만 5천 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노즈 중장은 평양 공략에 즈음하여 가장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부터 세 방면으로 동시에 진격하게 하였다. 즉 제9여단장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는 개성(開城) 【경기도】 에서 중화(中和) 【평안남도】 를 거쳐 적의 정면으로 향하였고, 제10여단장 육군 소장 타츠미 나오후미(立見尙文)는 삭령(朔寧) 【경기도】 에서 서북쪽으로 진격하여 동쪽에서 적의 측면을 압박하였으며, 제18연대장 육군 보병 대좌 사토 타다시(佐藤正)는 원산항에서 진군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세 방면의 행군은 미리 정해 놓은 대로 진척시켜 평양을 포위하는 형세가 대략 이루어졌으므로, 노즈 중장은 9월 15일 새벽을 기해 일제히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마옥곤 등은 대동강 남쪽의 진지에 숨어 오시마 부대를 맞이하여 잘 싸우며 방어하였다. 타츠미, 사토의 양쪽 부대가 서로 연락하여 북쪽의 요충지인 모란대(牡丹臺)를 함락시키고 나아가 현무문(玄武門)을 격파하여 본성(本城)으로 돌격하였으므로 적군은 백기(白旗)를 게양하였고 다음날인 16일에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사망자는 325명, 부상자는 864명이었는데, 적군은 총병(總兵) 좌보귀 이하 전사자가 약 2천 명, 부상자는 적어도 그 두 배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반도에는 다시 청나라 군대의 그림자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8월 30일에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제1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9월 8일을 기해 연합 함대의 호위 하에 우지나를 출항하여 원정의 길에 올랐다. 이리하여 전쟁은 점차 이어졌으므로, 같은 달 15일에 대원수(大元帥) 폐하는 다이혼에이(大本營)를 히로시마(廣島)로 옮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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